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의혹으로 각계각층의 반발이 이어지는 가운데 김명수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 완전 분리’라는 특단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애초 “블랙리스트는 없었다”며 모든 의혹을 어물쩍 넘어가려다가 국민적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할 수 있는 조치부터 서둘러 내놓은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에 대한 검찰 수사 의뢰 여부는 정치적 부담 때문에 결국 6월 이후에 결정하기로 했다.
김 대법원장은 31일 대국민 담화문을 내고 “대법원을 운영하는 조직과 법원행정처의 조직을 인적·물적으로 완전히 분리하겠다”고 밝혔다. 법원행정처는 본래 법원의 인사·예산·회계·시설 등을 담당하는 총무기관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주 업무가 사법부와 국회 및 청와대를 잇는 가교 역할로 변질되면서 사법부 독립성을 저해하는 대표 기관으로 지목됐다. 인사권 등을 앞세워 사법부 전반에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면서 법관들 사이에서는 승진에 필수적인 엘리트 코스로 인식되기도 했다.
김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를 대법원 청사 외부로 이전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할 것”이라며 “법원행정처에 상근하는 법관들을 사법행정 전문인력으로 대체하기 위한 노력도 조속히 시작하겠다”고 설명했다.
김 대법원장은 이와 함께 법관 서열화를 조장하는 승진인사를 폐지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또 사법행정권 남용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사법부 의사결정 구조를 수평적인 합의제로 개편하겠다고 강조했다. 법관독립위원회 설치, 윤리감사관 외부 개방, 사법행정 담당자가 지켜야 할 윤리기준의 구체화 등은 즉시 추진사항으로 꼽았다.
특별조사단의 조사 결과에 대한 의혹도 최대한 해소하겠다고 강조했다. 김 대법원장은 “현직 관계자들에 대한 엄정한 징계를 신속히 진행하고 조사자료 중 의혹 해소를 위해 필요한 부분의 공개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특조단이 확보한 410개 의혹 문서를 전면 공개하라는 법원 안팎의 요구를 사실상 수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양 전 대법원장 등 현직이 아닌 주요 관계자에 대한 형사조치 결단 시기는 “사법발전위원회·전국법원장간담회·전국법관대표회의 및 각계 의견을 종합해 최종 결정할 것”이라며 미뤘다. 전임 대법원장에 대한 사상 초유의 검찰 수사를 독단적으로 결정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큰 탓이다. 사법발전위원회·전국법원장간담회·전국법관대표회의는 각각 오는 6월5일, 7일, 11일로 예정돼 있어 최종 판단은 그 이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김 대법원장은 담화문을 이날이 아닌 6월 발표할 예정이었다. 이날 오전 출근길에도 취재진에게 “심사숙고해 결론을 나중에 말하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국정조사 가능성이 언급되는 등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돌연 입장을 바꿨다. 사법개혁을 완수하겠다고 취임했다가 코너에 몰린 그의 급박한 심정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김 대법원장은 “법원 재판에 누구도 부정한 방법으로 개입할 수 없다는 믿음을 얻지 못하면 사법부는 더 이상 존립의 근거가 없다”며 “대법원장으로서 그 믿음을 회복하기 위한 모든 일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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