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직장인이든 적어도 한 번은 회사 밖의 삶을 꿈꾼다. 웹툰 원작의 드라마에선 “회사 안이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라며 어쩔 수 없이 회사 안에서 악착같이 버텨야만 한다는 외침이 있었지만, 일반 직장인이라면 당장 눈 앞의 ‘전쟁터’가 가장 치열한 전장으로 보일 뿐이다. 오히려 회사 밖의 세계는 지옥일지도, 천당일지도 모를 불확실한 공간에 가깝다.
2012년 UX/UI 디자인 솔루션 스타트업 올리브스톤을 창업한 김다혜(36·사진) 대표는 정보기술(IT) 디자인 전문회사 팀장 출신이다. 몇 년을 분주하게 살던 어느 날,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마음 속에 일었던 일탈은 안정적으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IT 디자인 솔루션 프리랜서로 새로운 삶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됐다. 김 대표는 “자연스럽게 일이 커져 버린 것”이라며 “창업가로서의 모습을 마구 꿈꿨던 것도 아니며 사업을 크게 벌일 생각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사를 벗어난 세상은 예상했던 것보다 ‘지옥’에 가까웠다. 혼자 단칸방에서 일하기도 하고 작업실에서 쪽잠을 청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혈혈단신으로 자신의 브랜드를 시장에 알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 대표는 “조직의 옷이 벗겨지면서부터 ‘김다혜’라는 브랜드로 승부해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며 “잘 나가던 디자인 분야 팀장이 뭔가를 한다는 것을 다들 알아주리라고 착각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정글 속 6년이란 시간은 김 대표를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변화시켰다.
◇밖에선 실력, 안에선 리더십 … 나만의 ‘페르소나’를 찾다
“처음엔 고객에게 회계·세무 계산서도 제대로 끊어주지 못했던 초짜였다. 그렇지만 고객에겐 전문적인 디자이너였어야 했고, 직원들에겐 안정감을 주는 실장이어야 했다. 이 세 가지 모습이 충돌하면서 내면적으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아무에게 투자도 받지 않고, 빚도 내지 않았던 무일푼이었다. 갖고 있던 자산은 IT 디자이너로서 경력뿐이었다. 사업 실무를 모르는 건 당연했다. 어떻게 고객과 직원들을 대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백지에서 시작한 만큼 ‘생존’하기 위해선 바깥에선 실력을, 안에선 리더십을 보일 수 있는 자신만의 페르소나가 필요했다.
김 대표는 이를 ‘책임감’이라는 단어로 정리했다. 특히 함께 일하는 직원들을 위해 희생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1인 기업에 가까웠을 때는 언니 같으면서도 똑똑한 선배이자 선생님으로 다가가려고 했다”며 “일 잘하는 DNA를 심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에 같이 실무를 진행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작업실에서 같이 자면서 지냈다”고 말했다.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 IT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뛰기도 했다. 그는 “실무나 현장에서 흘리는 땀방울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막노동판에 뛰어들 수는 없었기에 강사 일을 하게 된 것”이라며 “한 회사의 대표로서 월세, 식비 등 갖가지 비용은 물론 직원들의 월급을 해결하는 게 최우선이었다”고 말했다.
창업 초기 이 같은 집념은 고객들에게 ‘책임감 있는 디자이너’를 증명해 주는 밑바탕이 됐다. 김 대표는 “고객에게 신뢰를 주고 필요한 존재가 돼야 한다는 마인드를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일에 대한 책임감을 고객들에게 보여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감이 따라오고, 직원도 더 뽑게 되고, 공간을 더 늘리게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주변을 보면 리더가 욕심을 부리면서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경우가 많더군요. CEO는 욕심을 내지 말고 배고픈 현실에 순응할 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CEO가 자기 몫을 챙기기 시작하면 답이 없어지거든요.”
◇디자인은 경험을 파는 것
UX는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의 약자로, 소비자가 소프트웨어나 제품 등을 직·간접적으로 쓰면서 느끼는 경험을 뜻한다. UI는 사용자 인터페이스(User Interface)로 휴대폰 등 디지털 기기를 소비자가 사용할 때의 환경을 의미한다. 따라서 UX/UI 디자인은 소비자들이 콘텐츠나 소프트웨어를 더 쉽고 재미있게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꾸미는 것을 말한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시계나 아이콘 배치부터 애플리케이션의 메인 메뉴까지 다양한 요소들이 UX/UI의 범위에 들어간다. 김 대표는 이 UX/UI 디자인을 “경험을 판매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유통업체에서 ‘유통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이야기로 푸는’ 신사업을 하고 싶을 수 있다. 이를 시각화해서 설계, 디자인해서 구현하는 게 저희가 하는 일이다. 이를 테면 ‘How’를 풀어주는, 즉 ‘어떻게’ 이야기를 풀 것인지에 관한 일이다.”
김 대표는 이 ‘How’를 건축에 비유한다. 마치 건축가가 논리를 통해 건물을 설계하고, 인테리어 단계에선 감성·미학적인 사고방식이 들어가듯, UX/UI에도 논리적 기획과 감성적 해석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경험을 ‘판매’한다는 사유는 대학원 때 문화예술경영을 전공하면서 예술과 상업을 같이 공부해 나온 산물이다.
그는 “당시 교수님들이 예술의 발전은 상업 발전과 함께 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이를 통해 문예는 사람들이 돈을 벌면서 즐기고 싶어하는 재화의 정점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던 것 같다”며 “예술의 상업화라는 개념을 우리 회사의 스펙트럼 안에서 넓게 가져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올리브스톤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들의 UX/UI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다. 올해는 금융기관과 함께 만든 모바일앱과 스마트ATM이 ‘iF디자인 어워드’ UX 부문에서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iF 디자인 어워드’는 독일의 컨설팅 회사인 인터내셔널 포럼 디자인(International Forum Design)이 수여하는 상으로 미국의 IDEA와 독일의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와 함께 공신력 있는 디자인 상으로 꼽힌다.
◇‘직원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통해 데스밸리를 넘다
“우리 업계는 지식산업이기 때문에 일감을 받아내 운영자금을 타는 게 매우 중요해요. 그렇기에 회사가 성장하려면 다양한 사업을 벌일 수 있어야 하는데, 저희는 IT디자인 하나에만 머물러 있었기에 곧 한계가 찾아왔던 거죠. 매출 확대도 인재 확보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게 저희가 겪었던 ‘데스밸리(Death Valley·초기 기업이 겪는 경영난)’였습니다.”
올리브스톤은 UX/UI 디자인을 하는 회사였기에 다른 스타트업에 비해 초기 비용이 많진 않았다. 그런 점에선 일반 스타트업이 겪는 데스밸리와는 비교적 거리가 멀었다. 보통 데스밸리는 초기 창업 단계에서 차입한 돈의 만기가 다가오면서 상환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데스밸리’는 찾아왔다. 열심히 발품을 팔며 고객은 유치했지만, 이것만으론 매출을 지속적으로 올릴 수 없었다. 김 대표는 “중소기업이 대기업 흉내를 내선 안 되고, 25명 규모 되는 회사의 리더도 1인 기업일 때의 행동을 반복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회사 규모에 맞춰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고, 연구개발(R&D)을 통해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소개했다.
김 대표가 심사숙고 끝에 내놓은 해법은 ‘직원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직원들에게 특정 연구를 진행하도록 독촉하는 대신, 원하는 시기에 자발적으로 과제를 발주하면 조직에서 지원할 수 있는 자원을 최대한 뒷바라지했다. 회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아이템이라도 상관없다. 한 사업 상품이나 콘텐츠를 두고 개발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직원들끼리 자발적으로 팀을 만들기도 한다. 김 대표는 이를 ‘내부 R&D’라고 부른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상품은 올리브스톤의 것이면서도 직원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회사에 ‘올리블리’라는 캐릭터가 있다. 근데 직원들이 ‘이걸 기술과 엮어서 상품을 만들 방법이 없을까’ 고민을 하더라. 그 캐릭터 디자인을 활용해 아이들을 위한 스마트 램프등을 만들자는 제안이 오갔다. 그렇게 해서 IoT(사물인터넷)과 연동해 여러 색깔이 나오는 등을 만드는 쪽으로 내부 R&D를 진행하고 있다. 그 외에 제주도 여행 경로 추천 앱과 올라뉴스(OlaNews)라는 뉴스 요약 애플리케이션도 이런 내부 R&D를 통해 탄생했다.”
그가 이런 내부 R&D 모델을 만든 데엔 여러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기업 규모가 작다는 점이다. 처음엔 따로 신사업팀을 만들었다. 그러나 김 대표는 “한 덩어리의 팀을 운영하면서 자본압박이 커진데다가 조직 대부분이 신규사업 개발에 집중하다 보니 수익창출에 나서야 할 인력이 팍 줄어 너무 리스크가 컸다”며 “작은 기업에서 R&D의 필요성은 매우 크지만 따로 기업의 역량을 떼어내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두 번째는 사업의 특성이다. UX/UI 디자인을 한다는 점 때문에 올리브스톤엔 IT콘텐츠 제작 전문가들이 많다.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고 자율적으로 협업하는 ‘내부 R&D’ 모델과 딱 맞아떨어지는 구성이었다. 김 대표는 “저희 직원들이 주로 하는 과제 중엔 자본을 투입하는 것보다 아이디어를 실체화시키는 일이 훨씬 많다”며 “회사 안엔 기획자, 디자이너 다 있어서 서로 마음이 맞으면 알아서 팀을 짜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고 전했다.
마지막은 금전적으로 직원들과 동료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미안함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같이 쭉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유다. 김 대표는 “직원들의 마음을 전혀 모르고 이들의 니즈를 설계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굳이 스타트업에 입사하는 이유는 ‘자신의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이 때문에 그는 가끔 직원들이 회삿일로 바빠서 자신이 내놓은 일을 못할 때마다 “1년에 2개라도 너만의 브랜드 상품을 만들라”고 독려한다고 한다.
“스타트업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는 이유는 ‘자신의 것을 다 뺏기고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만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사가 직원들에게 사업의 기회를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올리브스톤을 서비스 인큐베이팅을 잘하면서도 직원들 각각이 자신의 꿈을 키울 수 있는 회사로 성장시키고 싶어요.”
/심우일기자 vita@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