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통되는 세트형 물감은 유독 12색이 많다. 물감뿐 아니라 크레파스와 색연필도 12색이 기본이고 24색, 36색 식으로 확장된다. 현대미술가 박미나는 서울에서 유난히 많이 팔리는 유화물감 12세트를 브랜드별로 다 구입했다. 그런 다음 12개의 캔버스에 각각의 색을 ‘정직하게’ 칠해 전시장에 걸었다. 같은 이름의 빨강이지만 제조사에 따라 색깔이 조금씩 다르고, 12색의 구성도 차이를 보였다. 어쩌면 우리가 인식하는 색은 물감회사에 의해 규정되고 제한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색의 나열’로 일견 ‘색면추상’처럼 보이는 작품은 이 같은 태도에 대한 문제 제기다.
금호미술관이 기획전 ‘플랫랜드’를 열고 박미나를 비롯한 국내 작가 7명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 제목은 19세기 출간된 에드윈 애벗의 동명 소설에서 빌려왔다. 2차원 세계인 플랫랜드의 정사각형이 3차원과 0차원 등 다른 차원을 경험한 뒤 공간과 차원을 새롭게 인식한다는 이야기다. 색채 인식을 화두로 던진 박미나가 미술관 출입문과 유리벽을 빨강·노랑·초록 등의 원색 필름으로 덮어 관람객을 맞이한다.
1층 전시장에는 하얀 벽면 전체를 파란 나비가 뒤덮은 듯하다. 작가 최선은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안산 중앙시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시민들과 함께 캔버스에 떨어뜨린 푸른 잉크를 부는 참여형 작업을 진행했다. 나비나 구름처럼 보이는 푸른 형상은 사람들이 입으로 불어 만든 추상의 이미지다. 숨은 살아있는 존재 누구나 가진 것이며 숨을 내쉬는 ‘불기’는 ‘그리기’보다도 더 원초적인 미술행위다. “예술은 모두에게 내재된 언어”라는 작가의 주장을 실현한 작품으로 안산 외에 서울·인천·부산·시흥 등 6개 지역을 돌며 한 동네 사람들의 숨으로 대형 캔버스 한 장씩을 채웠다.
거대한 거미줄 같은 김진희의 작품은 라디오나 MP3 등의 부품을 최소 단위로 분해한 후 재조립해 만든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았던 사물의 구조를 드러낸다. 정교하게 조립돼 여전히 소리도 나지만 약간씩 끊겨 알아들을 수는 없다. 우리 주변에 분명 존재하지만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투영됐다. 차승언은 몇 해 전 동대문시장에서 가장 유행했던 반짝이 뜨개 실을 재료로 하거나 천의 패턴을 모티브로 작업하는 방식으로 현재 서울의 삶과 도시의 흔적을 작품에 반영했다.
나무와 판지를 이용해 가구인지 작품인지, 공간인지 벽인지 혼란스러운 조재영의 작품은 상대적인 존재성에 대한 실험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 최고참 작가 김용익은 대표작인 ‘땡땡이’ 시리즈의 장소 특정적 설치작품인 ‘유토피아’를 3층 전시장에 선보였다. 미술관 흰 벽에 연필로 그려진 원형 무늬는 옆으로, 혹은 위로 이어지다 캔버스를 만나면 빨간색, 검은색의 원이 되곤 한다. 전시를 기획한 김윤옥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는 “1960~70년대의 추상화는 도시화 속에서, 도시의 조형미감에서 파생된 경향이었다”면서 “최근에는 그것이 도시와 자본의 관계에서 전개된 개인의 이야기, 사적인 고찰과 취향과 어우러져 표현되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9월2일까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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