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광장이다. 월드컵 축구에 대한 응원 열기가 사람들을 광장으로 끌어내고 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첫 경기였던 스웨덴과의 결전은 응원하는 관중들을 탄식하게 했지만 끝까지 잘 싸워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은 하나였다. 당장 24일 자정에는 멕시코와, 이어 27일 밤 11시에는 독일과의 경기를 앞두고 있다. 강적에 맞선 무모한 도전이라 할지라도 선수들이나 응원하는 국민들 모두 포기할 리 없다. 그래서 더 달아오른 광화문 광장이다. 응원으로, 촛불로, 추모로, 축제로, 때로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내보려는 사람들로 언제 광화문 광장이 비었던 날 있던가. 설령 모두가 떠나고 잠든 시간일지라도 그 넓은 광장을 지키고 선 이가 있으니 바로 조각가 김세중(1928~1986)의 대표작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다. 1968년 4월 이후 반세기동안 같은 자리다.
이순신 동상의 제작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이 계기가 됐다. 왜군의 침략에 종묘·사직과 국토를 지켜낸 충무공 이순신이 전쟁영웅이자 평화수호의 상징으로 조명받기 시작했다. 1952년 진해에 조각가 윤효중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들어섰다. 갑옷을 입은 이순신 장군이 땅에 꽂은 장검을 양손으로 꽉 움켜쥔 형상이다. 몸과 칼이 나란히 수직으로 치솟아 엄숙하다. 동상 건립을 추진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제막식에서 “왜적을 격멸한 뒤 350여 년의 평화는 모두 이순신 장군의 공덕”임을 강조했다. 이후 충무공기념사업회의 의뢰로 조각가 김경승이 만든 ‘충무공 동상’이 1955년 부산 용두산 공원에 자리 잡았다.
조각가 김세중의 광화문 충무공 동상 건립은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시기이던 1966년 조직된 ‘애국선열조상위원회’가 추진한 첫 번째 사업이었다. 이 위원회는 민족의 모범이 될 인물을 선정해 동상을 건립하는 게 목적이었고 1968~72년에 집중적으로 활동했다. 이순신을 시작으로 세종대왕·사명당·이이·원효·김유신·을지문덕·유관순·사임당·정몽주·정약용·이황·강감찬·김대건·윤봉길 등 15개 동상을 건립했다. 대부분 대기업의 헌납으로 만들었지만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만은 박 전 대통령이 제작비를 댔다. 군인 출신의 박 전 대통령이 무사인 충무공을 세종대왕보다 더 추켜세웠다는 얘기도 전한다. 미술사학자 조은정은 저서 ‘동상’(다할미디어 펴냄)에서 “이들 동상은 한결같이 손을 들어 대중을 이끄는 선지자의 모습을 보인다”면서 “오른손으로 시선을 끌어모아 위엄을 과시하던 것은 고대 로마황제의 조각을 본 딴 듯하다”고 분석했다.
서울 한복판에 누구나 지나며 볼 수 있는 조각상인지라 논란과 시비가 많았다. 우선 얼굴이다. 충무공 동상이 왜 현충사 표준 영정과 다르냐는 비판이었다.
“예술은 하나의 거목에서 무한한 내면성을 찾으며 그 시대의 이념과 요청을 반영시켜 끊임없는 새 양심과 인격 정신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나 부처의 모습이 수만 가지의 형상으로 표현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 같은 예술관을 가진 김세중에게 사진같은 영정을 만드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형식에 대한 논란도 따랐다. 칼을 오른손에 쥐고 있으니 전쟁에 진 장수, 즉 패장(敗將)이라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조은정 평론가는 “칼을 오른손으로 내리누르듯 잡고 있는 것은 왼손으로 칼집을 잡고 오른손으로 금방 칼을 빼들어야 하는 장군이 아니라 이미 전쟁을 끝내고 승리한 장군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전적으로도 인물 동상은 칼을 비롯해 횃불이나 깃발 등 ‘오른손’에 상징물을 치켜든 모습으로 승리를 표현했다. 갑옷의 고증도 논란이 됐다. 광화문 충무공 공상은 순종 황제릉인 남양주 금곡 홍유릉의 석인(石人)이 쓰고 있는 두정갑(豆程甲)을 쓰고 있다. 전투복 치고는 긴 치마 같은 전복(戰服)도 트집거리였다. 하지만 걷거나 차를 타고 지나는 사람들이 고개를 치켜들어 바라보는 동상이다. 아래쪽 감상자의 시선은 이 치마자락 같은 갑옷을 타고 자연스럽게 얼굴까지 타고 오른다. 게다가 긴 갑옷 자락의 부드러운 주름이 고전미와 숭고미를 이룬다. 몸보다 칼이 유난히 큰 것 또한 감상자의 위치 때문이며 승리를 강조한 선택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서울시가 광화문을 포함한 도심정비 계획을 추진하며 동상의 위치가 입방아에 올랐다. 동상이 있는 세종로와 충무공이 무관하다는 게 시빗거리였다. 실제로 광화문 우측으로 옮길 계획까지도 발표됐다. 용산구로 이전하자는 얘기도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전쟁기념관이 있는 용산구에 김세중의 집과 작업실이 있던 터였다. 별의별 논란을 거치면서도 “그래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기에 지금도 광화문 광장에서 충무공을 만날 수 있다. 미술사학자 최열은 ‘조각가 김세중’(현암사 펴냄)에서 “김세중은 ‘멸공통일’의 전쟁 구호에도 아랑곳없이 ‘평화운동’을 거론하던 청년 예술가였다”면서 “모두가 보게 될 충무공 동상에서 작가가 추구했던 것은 평화 시대를 여는 당당함과 활력이었다”고 말했다. 하기야 광화문 네거리에 뻣뻣한 장군상이 섰더라면 지금처럼 응원할 맛이 났겠나 싶기도 하다.
김세중은 1928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는 문학 소년이었고 연극에 대한 꿈도 있었다. 고교 시절 일본어로 번역된 릴케의 ‘로댕 어록’을 읽고서 조각가가 되기로 했다. 1946년 개교한 서울대 미술대학의 제1기 졸업생이 됐다. 스승인 장발(1901~2001) 교수 등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교했다. 불교신자인 부모님 뵙기가 괴로워서 명동성당 기숙사에서 3년을 지냈다. 로댕이 한때 수도원에서 은둔 시절을 보냈듯. 대학원을 졸업한 김세중은 프랑스로 유학해 종교미술을 좀 더 공부하고 싶어했지만 전쟁이 터졌다. 피난 중이던 1952년에 마산 성지여고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바로 이곳에서 평생의 반려자인 김남조 시인을 만났다. 당시 김 시인은 이 학교 국어 선생님이었다. 두 예술가는 1955년 중림동성당에서 결혼했다.
손쉽게 만날 수 있는 김세중의 작품은 광화문 이순신 동상 외에도 1977년 국회의사당 본관 앞 좌우에 세운 ‘애국애족의 군상(群像)’, 근대문화유산인 혜화동성당의 정면에 두루마리 그림을 펼쳐놓은 조성된 부조 작품 ‘최후의 심판’ 등이 있다. 사실 김세중은 대규모 기념비적 조각상을 집중적으로 제작하던 그 시절 몇 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기간을 종교적 내용의 작업에 몰두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동상 ‘골룸바와 아그네스’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김효임·효주 자매를 조각한 것으로 1954년 제1회 성(聖)미술전에 출품된 작품이다. 끝물에 이른 유교적 통치가 자행한 박해와 순교를 담담하게 받아들인 고귀한 희생을 단순함의 미학으로 표현해 소박하지만 숭고하다. 사람은 둘이나 한 덩어리로 연결돼 있다. 강직한 얼굴에서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정신성의 승리가 감지된다. 그 원본 격인 석고상은 용산구 효창동 김세중기념사업회의 김세중미술관에 있으며 지난해 8월 등록문화재 제690호로 지정됐다. 30년쯤 지나 제작된 ‘두 여인’은 흡사한 구도지만 인체의 곡선미가 더 강조됐고 한층 성숙한 우아미가 돋보인다. 작가가 너무 일찍 소천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작품을 펼쳤을지 짐작하게 하고 또 안타까워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1984년작 ‘예수상’ 역시 그가 추구한 정신성을 보여준다.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의 우물에서 ‘사랑’의 시어들을 길어올린 김남조 시인은, 남편과 함께 살던 이 집을 지켰다. 시 쓰며 아이 넷을 키우는 데다 숙명여대에서 후학까지 가르치던 그에게 월급봉투 한 번 가져다준 적 없으면서 작품밖에 모르는 바쁜 남편은 어떤 존재였을까. 김세중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서 과천관 건립에 온 힘을 쏟던 중 개관 직전인 1986년 6월 24일, 지병에 과로가 겹쳐 급하게 세상을 떠났다. 과할 정도로 겸손했던 그는 작가 생활 40여년 동안 한 번도 개인전을 열지 않았다. 주저했던 것이다. 유려한 사랑의 시들을 발표하고도 “설익은 술을 퍼내 손님들을 대접한 심정”이라고 고백한 김남조 시인과 닮았다. 그들은 천형(天刑)같은 예술가의 삶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김 시인은 1955년부터 30년 가까이 산 자택 겸 작업실을 ‘예술의 기쁨’이라는 문화예술공간으로 공공에 내놓았다. 지난 2015년에는 총면적 234평 규모의 2층 건물로 다시 세웠다. ‘김세중 미술관’의 명패는 지난해 말에 걸렸다. 사재를 털어 제정한 ‘김세중 조각상’은 본상과 청년조각상, 저작·출판상으로 나뉘는데 그 수상자들의 이름으로만 한국현대미술사를 쓸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높다.
원로시인은 지금도 시를 쓴다.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일이다. 그게 내 나라, 내 조국이 잘 되기를 염원하는 응원의 마음일 수도 있다. 미우나 고우나 응원하는 거니까. 역사를 아로새긴 경복궁과 그 정문 광화문, 서울 도심을 끌어안고 있는 북악산과 그 옆 인왕산도 변함없이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충무공 장군상도 오래오래 서울의 심장을 관통하는 세종대로를 변함없이 지키고 섰으리라.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도 16강 진출의 승전고를 울릴 두 경기, 180분이 남아 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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