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전은 원래 미군이 수행하려다 외모가 비슷한 한국군에 떨어졌다. 하지만 군이 낙동강 방어에 총력전을 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보니 10대의 앳된 학도병에게도 임무가 맡겨졌다. 이명흠 대위가 지휘한 대원 772명의 대부분이 학도병이었다. 불과 보름간의 기초훈련을 받고 작전에 투입된 이들은 상륙 당일 태풍으로 수송함 문산호가 좌초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상륙을 감행했다. 대원들은 일주일간의 혈투에서 130여명이 전사하고 110여명이 부상하는 희생 끝에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은 물론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정예병인 제5사단을 영덕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철수할 때 포격을 받아 수십명이 끝내 구조선에 오르지 못한 아픔도 있었다.
작전에 투입된 문산호는 미국이 1943년 건조해 태평양전쟁에 투입한 2,700톤급 전차상륙함(LST· Landing Ship,Tank). 광복 후 우리 정부에 매각돼 교통부 산하 대한해운공사 소속의 수송선으로 활용되다 한국전쟁 때 징발됐다. 이때 선장과 선원 10여명이 군번조차 없이 참전했다. 인천상륙작전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던 장사상륙작전은 1997년 영덕해안을 수색하던 해병대가 개펄에 묻혀 있는 문산호를 발견해 재조명됐다.
해군이 6·25 68주년을 맞아 장사상륙작전 중 전사한 고 황재중 문산호 선장에게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한국전쟁에 목숨을 걸고 참전했지만 군인 신분이 아니었기에 서훈에서 누락된 것을 발견한 군이 뒤늦게 서훈을 추진한 것이다. 그의 전사 68년 만이니 때늦은 감이 있다. 보훈에는 시효가 있을 수 없다. / 권구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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