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독일로 떠났다. 스물세 살. 간호사의 일도, 이국땅에서의 외로운 밤도 처음이었다. 몸은 피곤하건만 잠 못 드는 나날이었다. 그럴 때마다 붓과 물감을 꺼냈다. 제대로 미술 공부 한 번 못해본 그녀가 동틀 무렵까지 그린 풍경화와 일련의 추상 작업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 있는가’를 되묻는 존재감 확인의 과정이었다. 침대 밑에 숨겨둔 그림 더미를 처음 본 이는 감기몸살로 몸져누운 그의 안부를 확인하러 온 수간호사였다. 병원에서 전시를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작지만 울림이 큰, 첫 개인전이었다. 훗날 독일 함부르크 국립미술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 정교수로 20년 이상 재직한 화가 노은님(72·사진)의 시작이었다. 최근 독일 남서부 헤센주의 미헬슈타트시립미술관은 5년째 진행 중인 민속박물관의 리모델링 공사 후 내년 11월 재개관에 맞춰 미술관 안에 조성된 노은님의 작가 방을 공개하기로 했다. 문화적 자부심이 높은 유럽에서, 권위 있는 공립미술관이 한국 미술가를 위한 영구전시실을 내주기는 처음이다.
이른 더위가 찾아온 지난달 말 경기도 양주시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을 방문한 노은님 작가를 서울경제신문이 만났다. 이 미술관에서는 개관 4주년을 기념해 거장 장욱진과 노은님의 2인전인 ‘심플(SIMPLE) 2018:장욱진·노은님(8월26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금의환향’ 한 세계적 작가는 지나칠 정도로 소박했다. 자랑이 앞설 만하건만 표정은 수줍고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그에게 왜,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됐는지부터 물었다.
“우리 어머니가 딸 일곱에 아들 둘, 9남매를 낳고 마흔둘에 돌아가셨어요. 사진 한 장이 귀하던 시절이었죠. 나도 엄마 얼굴, 엄마 초상화를 꼭 하나 품고 살고 싶어서…. 당시에는 사진처럼 초상화를 그려주는 집이 있었는데 찾아가 그림 좀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졸라서 겨우 세 번 배우고는 그 뒤로 집에 물감을 숨겨두고 끄적인 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였어요.”
1946년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은혜 은(恩)자에 맡길 임(任)자를 쓰는 복된 이름을 받았다. 면사무소에서 결핵 관리요원으로 일하던 중 우연히 본 신문광고를 따라 파독간호사로 자원하겠다고 했을 때 식구들은 믿지 않았기에 말리지도 않았다. 석 달 후 갑자기 떠날 때도 이렇게 긴 여행이 될 줄은 몰랐다. 1972년 근무하던 독일 병원 회의실에서 연 첫 전시의 제목은 ‘여가를 위한 그림들’이었다. 입소문을 타고 함부르크 지역 신문에 보도되며 화제를 일으켰다.
“너무 많은 사람이 온 것을 보고 놀란 나머지 얼굴 근육이 굳어버려 내내 뚱한 표정으로 전시장에 있었죠. 그때 월급이 400마르크였는데 어떤 분이 그림 한 점을 사고 싶다며 2,000마르크나 주는 거예요. 내 몫 같지 않고 마치 훔쳐온 돈같이 불안해서 그날 밤 아버지에게 동생들 학비에 쓰시라는 편지와 함께 처음 받은 그림값을 한국으로 보냈죠.”
이 전시가 함부르크 국립미술대 교수인 한스 티만(1910~1977)의 눈에 들었다. 티만은 바우하우스 출신이며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의 제자인 유명 화가다.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해보라는 그의 독려로 대학에 입학했다. 도제식 교육이라 누구를 사사했는지가 중요한 유럽미술계인 만큼, 시작이 좋았다. 티만에 이어 카이 수덱(1928~1995)을 스승으로 만나 예술의 기반을 닦았다.
“입학하고도 3년간은 이 길이 내 길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유치원생 같은 서툰 솜씨의 작은 내 그림이 늘 창피해 숨겨두던 시절이었어요. 미술의 기초를 익힌다는 생각으로 점과 선만 그리는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쌀을 떨어뜨리고 먹으로 문질러 ‘우연’히 그린 그림을 시도했던 게 ‘내 그림 세계’의 시작이었지요.”
표현주의 회화와 개념미술이 태동한 독일에서 노은님은 남들이 생각지도 않았고 흉내도 못 낼 자신만의 색깔을 칠하고 있었다. “작은 새 가슴 털 같은 점들과 물고기 비늘 같은 선들”처럼 그가 눈여겨보고 궁금해한 것은 작고 힘없지만 순수한 ‘자연의 본질’이었다. 독일 표현주의에 동양철학의 존재론을 결합해 무위자연을 노래하는 독창적 화풍이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작가는 전시장에 걸린 1986년작 ‘해질 무렵의 동물’을 가리키며 “불에 타고 있는 나”라고 했다. 폭 260㎝의 한지를 붉은 배경과 검은 짐승이 꽉 채우고 있는 이 작품은 파리·브뤼셀·뉴욕에 전시장을 둔 유럽의 큰손 화랑 필립규미옥갤러리의 눈에 띄었다. 그리하여 1990년 세계 3대 아트페어 중 하나로 꼽히는 프랑스 피악(FIAC) 아트페어의 개인전으로 연결됐다. 이후 그림은 카프카의 ‘변신’과 나란히 프랑스 중학교 문학 교과서에 수록됐다. 한국 화가의 그림이 유럽 교과서에 소개된 것 또한 드문 일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2년쯤 지났을 무렵 작품 2점을 제출해 함부르크시와 독일 정부 양쪽에서 예술후원금을 받았어요. 그 계기로 전시 초청이 많아져 1년에 20개씩 전시했어요. 그러다 보니 강단에 서게 됐고 강사 생활 3년 후 교수가 됐죠. 교수 지원자가 100명쯤 됐을 거예요. 면접관이 ‘몽실몽실한 그림의 네가 대학에서 뭘 가르칠 거냐’고 묻길래 ‘나까지 똑같이 아카데믹한 것을 가르쳐야겠느냐’고 되물었어요.”
교수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노 작가의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 교수 임용이 결정됐다. 1997년에는 화재로 손실된 함부르크 알토나 성요한니스교회 재건에 응모해 총 480점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맡게 됐다. “사람만 교회에 가는 게 아니라 온갖 생명 만물이 찾아와 즐기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기·물·불·흙의 4대 원소를 새와 물고기, 강렬한 색채와 나무로 표현했다. 작업 규모도 엄청났지만 종교화를 그려본 적 없는 동양여자가 지역 상징인 교회 장식을 도맡는 바람에 노 작가는 방송 토론프로그램에 출연해 작품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이 인연이 훗날 서울 강남LG타워의 유리벽화, 강원도 문막 오크밸리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이어졌다.
“함부르크 사람들이 나더러 ‘상어 같은 여자’라고 하더군요. 자기들은 피라미라며…. 하지만 내 젊은 시절은 남들에 비해 없는 게 더 많았던 때였어요. 그래서 마음고생도 많이 했고, 항상 벌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다만 독일은 ‘뒤끝’ ‘앙심’이라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지금의 감정으로 나중에 앙갚음하는 마음이 없기에 내 생각을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지요.”
상어라기보다는 산호초처럼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켰다. 그저 시간이 물길을 열어줬을 뿐이다. 그는 “자연의 법칙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시간”이라며 “다 때가 있으니 ‘나 이런 그림 그리는 사람이다’라고 외치며 찾아다니지 않아도 자연히 만나게 된다”고 말했다. 진짜 그랬다. 그가 22년째 집과 작업실을 두고 있는 미헬슈타트시(市) 시장의 전화를 받은 것은 지난 3월, 회고전 때문에 머물고 있던 뉴욕에서였다. 시립미술관에 기념할 만한 ‘작가의 방’을 만드는데 세계적 미술기관 소속의 선정위원들이 자신을 추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미술관에 자신의 이름으로 영구전시장을 가진 인물은 미헬슈타트 출신의 인문학자 니콜라우스 마츠(1443~1513)와 유대학자 젝켈 룁 봄저(1768~1846), 책 디자이너 프리츠 크레들(1900~1973)뿐이다. 외국인이자 현대미술가는 노은님이 유일하다. 고향이 그리워 그림을 시작한 그에게 예술의 힘이 고향 같은 안식처를 마련해준 셈이다.
“내 고향은 예술이에요. 그림은 나를 버리고 욕심을 덜어내는 과정의 산물이지요.”
자랑할 줄도 모르고 거들먹거리지도 않는다. 세속적 욕망을 다 버린 자리에 오롯하게 남은 알맹이, 그게 노은님이다.
/양주=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사진 이호재기자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