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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건축가 조성룡] "잠실대첩, 풍경·역사성·사람 어우러지는 도시 공간 고민했죠"

■43년 건축인생

혁신적 설계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생태공원으로 되살린 선유도공원 등

건축사에 남을 굵직한 프로젝트 맡아

건물 풍화 지연시키는 것, 건축가 몫

오래된 건물 재생 작업에도 열정 쏟아

■화첩·중첩·경첩 '잠실대첩'

입지·조건 자체로 프리미엄 갖춰

도시와 유기적 연계된 주거단지 중점

일조권 등 고려 주상복합 배치도 신경

일부 불투명한 절차로 공모 의미 퇴색

주민들에 설계의도 설명, 공감얻고 싶어

조성룡 건축가 인터뷰./권욱기자




사람이 늙듯 건물도 늙는다. 인간이 노화(老化) 과정을 거쳐 사거(死去)하듯 건물은 풍화(風化)를 통해 퇴화하고 소멸에 이른다. 건물은 지어 사용하면서부터 천천히 낡아간다. 건물의 풍화를 막을 수 없다면 이를 지연시키거나 노화를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는 것도 건축가의 몫이다. 낡은 건물을 헐고 다시 짓는 것은 쉽지만 오래된 장소와 건물을 재생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건축가 조성룡(74)은 40여년의 건축인생 동안 국내 최고 권위의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을 두 차례나 수상하고 각종 건축상을 휩쓴 거장이지만 ‘작업’ 목록에는 대기업의 사옥이나 지방자치단체 청사 같은 ‘화려한’ 프로젝트가 별로 없다. 대신 오래된 건물과 장소를 재생하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보낸 그는 소박하지만 우리나라 건축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랜드마크를 만들어냈다. 한강정수장을 재생한 선유도공원이나 옛 어린이대공원 교양관을 리모델링한 꿈마루 등이 그것이다.

선유도공원은 지난 2011년 국내 건축 전문가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 1위로 꼽았고 2013년 건축가 100명이 뽑은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 20’에도 꿈마루와 함께 포함됐다. 임석재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는 선유도공원에 대해 “근대화의 주요 공신이었지만 혐오시설로 남기 쉬운 산업화 시대의 잔재를 매력적인 생태공원으로 살려냈다”며 “근대화 시기 개발의 미덕을 후기 근대화 시기 문화의 미덕으로 이어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높이 평가했다. 꿈마루 역시 철거될 상황에 놓인 건물을 건축가의 고집과 끈기로 살려내고 새로운 가치를 불어넣은 역작으로 꼽힌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건축가는 최근 43년 건축인생을 담은 ‘건축과 풍화-우리가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이라는 책을 펴냈다. 책 제목에 건축가의 건축철학이 녹아 있다. 그는 책 머리말에 건축가 모센 모스타파비의 저서 ‘온 웨더링(On Weathering)’을 언급하며 “건물은 완성돼 사용하면서부터 기의 영향으로 천천히 낡아가기 때문에 건축의 목표는 이 피할 수 없는 과정에서 가능한 한 풍화를 지연시키며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노화를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는 데 있다”며 “돌이켜보면 지난 몇십년 동안 몰두했던 생각과 실현하고 싶었던 작업들은 대체로 이러한 사상과 닿아 있다”고 적었다.

조성룡은 1944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기계설계엔지니어였던 부친을 따라 서울에 나왔다가 해방을 맞았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설계도구를 가지고 놀았다. 미대에 가고 싶었으나 부친과 친척들의 만류로 뜻을 접었다. 인하대 금속과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건축과로 전과했다. 대학 졸업 후 우일건축에 근무하다 1975년 우원건축연구소를 설립해 독립했다.

1983년 국내 아파트로는 최초로 국제설계공모를 실시한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선수촌 및 기념공원’ 프로젝트에 33대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선되면서 일약 건축계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그는 “1980년대 초에 독립기념관이나 예술의전당과 같은 대형 국가 프로젝트가 많아 다른 건축가들이 아파트 설계 같은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당선됐다”고 겸손해하지만 아시아선수촌아파트에는 지금 봐도 놀라울 정도로 혁신적인 설계요소가 수두룩하다.

요즘은 일반화됐지만 건물 1층을 채우지 않고 필로티 구조로 띄워 주민들이 차도가 아닌 길로 동(棟)과 동 사이를 다닐 수 있도록 했고 한 동의 층수도 일률적으로 하지 않고 9층부터 18층까지 다양한 높이로 설계해 단조로움을 피하면서 아기자기함을 더했다. 엘리베이터와 집 현관문 사이가 완만한 경사로 이뤄져 옆집뿐 아니라 위층과 아래층 세대가 복도에서 서로 마주치도록 설계됐다. 위아래층에 사는 주민들이 알고 지내면서 교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설계자의 의도다.

아파트는 혁신적인 설계요소뿐 아니라 1,600세대의 대규모 고층단지를 여덟 개의 작은 마을로 나눠 한동네에 사는 느낌을 강조하고 사방에 네 개의 출입구를 만들어 인근 주택가와도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아파트 단지가 도시에서 고립된 ‘섬’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설계자의 철학이 곳곳에 묻어 있다. 자부심을 느낄 법도 하지만 그는 “설계에 여러모로 아쉬운 대목이 많다”고 했다. 나름대로 고민하고 공을 들였음에도 공동성과 공공성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조성룡 건축가 인터뷰./권욱기자


최근 잠실주공5단지 재건축 설계공모에 뛰어든 것도 아시아선수촌아파트에 남은 아쉬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이후 해운대 빌리지를 비롯해 분당 연립주택, 도곡동 우성 캐릭터빌 등 크고 작은 도시 공동주택을 다수 설계했다. 건설사가 주도하는 국내 아파트 공급 시스템에서 건축가의 역할이 제한된 상황에서도 도시 구조와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주거공간을 설계하는 데 오랜 기간 천착했다. 그런 그가 4,000세대 가까운 매머드급 단지인 잠실주공5단지를 허물고 다시 짓는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터다.

국내 재건축 아파트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잠실주공5단지 국제설계공모전에 당선됐지만 건축가에게는 ‘상처뿐인 영광’이다. 일부 조합원들이 “과도한 공공성으로 주민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했다”고 반발하며 설계 수정을 요구하고 나선 탓이다. 당선 발표 후 2개월이 지난 6월 초에 실시된 조합원 투표에서 우여곡절 끝에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으나 아직 정식 계약을 맺지 못한 상태다. 조합 측과의 협상이 원만하게 이뤄지지 못할 경우 우선협상대상자 지위가 박탈될 수도 있다. 건축가는 공모전 당선 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로 심신이 많이 지친 상태다. 특히 공모 과정에서 서울시가 보인 태도에 실망이 큰 듯했다.

“민간 아파트를 재건축하는 데 국제설계공모를 한 것은 전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35층이었던 한강변 아파트의 높이 제한을 풀어 50층까지 지을 수 있도록 종 상향을 해주는 대신 공공성을 가미하겠다는 서울시의 의도 자체는 좋습니다. 공모를 통한 공론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의 이해를 반영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절차가 매우 불투명하게 진행되면서 공모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설계한 ‘잠실대첩(蠶室大帖)’안은 기존 아파트 건물 일부를 리모델링해 공공시설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송파대로와 올림픽로에 인접한 준주거지역 내 초고층 건물이 내부 공동주택에 미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한 설계가 돋보인다는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서울시는 3월30일 조 건축가에게 당선 사실을 통보하면서 인허가 심의가 통과되기 전까지 당선안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비밀 유지 서약서를 작성하도록 하는 등 납득하기 힘든 행보를 보였다.



“당선작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으면서 온갖 억측이 난무했습니다. 건축가가 설계 의도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면서 언론에서 실제 사실과 다른 내용을 보도하고 조합 측에서는 당선안을 수정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했습니다.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참 답답하더군요. 지금까지는 서울시도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입장을 밝히지 않았으나 적어도 잘못 알려진 사실은 바로잡고 주민들에게 제 아이디어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이번 국제설계공모전의 공모 범위는 단지 전체가 아니라 송파대로와 올림픽로와 연접해 있는 준주거지역과 3종 일반주거지역의 일부에 국한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준주거지역에 대한 설계도 실시설계일 뿐 계획설계를 하는 과정에서 내부 공동주택 설계를 맡은 토문건축과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또 잠실사거리와 맞닿아 있는 지점에 위치하는 성큰광장의 명칭을 ‘민주광장’으로 명명한 적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단지 내 4차선 도로 역시 자신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의 지침에 따라 이미 결정돼 있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설계 아이디어에 대해 조합원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할 자세가 돼 있다고 했다.

“설계하면서 가장 고민한 것은 서울에서 처음으로 50층짜리 주상복합 5개 동을 밀집해 지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서울시가 기초한 설계안을 보면 주상복합 5개 동을 남쪽 올림픽로를 따라 배치하도록 돼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동지 때 내부 공동주택 절반 이상이 그늘지게 돼 일조권 침해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50층짜리를 동쪽 송파대로 쪽으로 옮기고 3개 동으로 줄였습니다. 대신 남쪽은 30층 이하로 낮추되 높낮이를 다르게 하고 50층짜리와 각도도 달리했습니다. 바람 문제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고층 건물만 있으면 와류 때문에 바람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소용돌이치고 미세먼지도 밑으로 내려와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 조합원이 지적하는 입면 디자인에 대해서도 건축가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그는 주상복합을 콘크리트 건물로 짓는 방안을 제시했다. 기둥과 보를 철골로 세우거나 받치고 벽체를 유리로 마감하는 커튼월 방식을 선호하는 조합원들은 조 건축가의 설계안에 대해 “성냥갑 같다”고 비판한다. 그는 사람마다 기호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초고층 아파트는 커튼월로 지어야 한다’는 인식에는 동의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요즘 초고층 건물을 커튼월로 짓는 것이 하도 유행처럼 되면서 익숙해진 탓입니다. 커튼월 방식이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아무리 잘 지어도 일조나 환기 문제 등 단점이 많습니다. 콘크리트로 짓더라도 얼마든지 외관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콘크리트가 커튼월 방식보다 안전도에서도 뛰어납니다. 현장 타설이 가능해지는 등 기술적으로도 발전해 요즘 미국 맨해튼 등지에서는 초고층 아파트를 콘크리트로 많이 짓습니다.”

잠실주공5단지 재건축 국제설계공모 당선작 ‘잠실대첩’./제공=도시건축집단/조성룡도시건축


당선작명인 잠실대첩의 ‘첩’은 크게 세 가지 뜻을 내포한다. 풍경과 경관을 고려한 설계라는 뜻에서 ‘화첩(畵帖)’과 역사성과 삶의 연결이라는 의미에서 ‘중첩(重疊)’, 서로를 이어준다는 뜻의 ‘경첩’이다. 단지 내 주민의 쾌적한 주거환경뿐 아니라 준주거지역의 판매·업무시설에 소호(SOHO) 등의 공간을 마련해 입주민은 물론 시민들이 교류하면서 복합적인 액티비티가 활발하게 이뤄지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는 설명이다. 주민이 집에서 나와 공원과 카페·레스토랑·도서관·데이케어센터 등을 걸어서 5분 내에 이용할 수 있는 콤팩트 시티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담았다.

그는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단순히 아파트 단지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한 부분으로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특히 강남의 옆 동네가 아닌 송파 자체가 지닌 역사성에 주목했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알 수 있듯 송파는 2,000년 전 백제의 수도였다. 그래서 건축가는 올림픽대로와 가까운 단지 북쪽은 토성의 흔적들을 일부 차용했다.

“인근에 123층짜리 빌딩이 들어서 있고 대형 유통시설과 테마파크가 가까운데다 이미 50층을 확보한 잠실주공5단지는 입지와 조건 자체로 프리미엄을 갖춘 곳입니다. 도시와 유기적으로 연계되고 외부와 서로 소통하는 주거단지로 자리매김한다면 더욱 가치가 올라갈 것이라고 봅니다. 주민들에게 이러한 설계 의도를 설명하고 공감을 얻어내는 것도 재건축의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성행경기자 saint@sedaily.com

He is

△1944년 일본 도쿄 △인하대 건축과, 동 대학원 석사 △1975년 우원건축연구소 설립 △1996~2003년 서울건축학교 교장 △2004~2009년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2006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현재 성균관대 성균건축도시설계원 초빙 교수, 도시건축집단/조성룡도시건축 대표

◇주요 작업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의재미술관 △서울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이응노의 집-생가 기념관 △서울 어린이대공원 꿈마루 △선유도공원 △지앤아트스페이스

◇수상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2001년·2013년) △서울시건축상(1986년·2003년) △한국건축가협회상(1992년·2003년) △김수근문화상(2003년) △서울시 올해의 건축가상(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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