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한지 붙여 의도적 얼룩..‘고단함’으로 독특한 질감 표현
갑골문자서 찾은 인간상·감정 숨긴 마스크 등 ‘문자추상’ 담아
해방 후 첫 佛 건너가 고생 끝에 명성..백상 장기영 후원받기도
눈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화폭에 내려앉았다. 무더위 씻은 한여름 소나기 지난 자리려나. 새파란 하늘이 부드럽게 구름을 밀어낸 게 아니라 칼로 무 자르듯 갈랐다. 하늘 속 구름인지 구름 속 하늘인지 뒤엉킨 그 틈새로 더 깊고 짙은 푸른색이 펼쳐진다. 몸과 마음에 걸친 덧없는 것들 다 벗어던지고 뛰어들고픈, 바다 같다. 하늘과 바다가 구름 속에서 뒤엉켰으니 ‘환상’인가보다.
화가 남관(南寬·1911~1990)이 붙인 제목대로. 평면의 그림 한 점이 높이감과 깊이감 모두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촉촉한 눈으로, 혹은 비 맺힌 창 너머로 본 하늘처럼 그림에는 물기 어린 영롱함이 가득해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이 작품 ‘환상’을 하늘에 빗댄다면 비와 더위 사이에서 만나 절대 한순간도 잡히지 않을 하늘이요, 하늘이면서도 바닷물을 길어올린 듯하고 하늘이면서도 땅속에서 캐낸 것인 양 질감이 독특하다. 기법이 그렇다. 그림을 그렸다기보다는 종이를 오려 붙이거나 붓으로 찍는 식이다. 혹은 색을 누르고 문지르고 밀치고 긁고 흔들었다가 다시 붙이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그 고단함이 시간의 결을 이뤘다. 작가는 한지를 캔버스에 붙인 다음 물감을 칠하거나 떼어낸 자리에 의도적으로 얼룩을 만들곤 했다. 물감을 번지게 하거나 흘리는 방식, 데칼코마니 기법까지 끌어들여 우연을 시도했다. 일부러 재료를 닳게 해 오래된 흔적을 담았고 긁고 찔러 상흔을 만들었다. 참신한 현대 추상미술인 그림에서 거친 고분 벽화나 오랜 고대 유물을 느낀 이유다. 남관이 그린 ‘환상’은 전후 세대의 암울한 상처를 덮은 쾌청한 기쁨이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언젠가 겪었을 과거와 앞으로 도래할 미래까지 집어넣었다.
남관은 대표적인 한국의 1세대 추상화가이며 해방 후 프랑스로 진출해 현지에서 이름을 떨친 첫 번째 화가였다. 그보다 앞서 일제강점기 때 유럽으로 간 이종우·배운성이 있었고 나혜석도 여행 겸해 거치긴 했으나 해방 후 도불(渡佛)은 남관이 처음이었다. 이응노·김환기·이성자·김흥수·권옥연·한묵 등은 그 뒤였다.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이름 앞에 ‘문자추상’이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갑골문자 같은 것을 더 변형시키면 마스크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작가는 고대 상형문자에서 인간을, 특히 얼굴을 발견해 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인 1967년작 ‘태고’부터 1979년작 ‘폐왕의 환상’ 등 일련의 작품들은 갑골문자에서 찾은 인간상을 보여준다. 자연의 형상을 축약한 상형문자에서 남관은 사람의 얼굴을 봤고, 한발 더 나아가 감정을 숨긴 가면(마스크)을 찾아냈다. 신라 금관처럼 화려한 장식을 두르고 주변을 내려다보는 황제,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위엄있는 자세에 봉긋한 가슴을 뽐내는 여왕, 고뇌하는 관리, 당황한 선비,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믿지 못하는 폐왕 등을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들이 솥 정(鼎) 자나 임금 제(帝), 재계할 재(齋), 콩 두(荳) 자를 읽게 하니 기발하다. 상형문자라는 것이 본래 마음만 통하면 문맹이나 어린아이에게도 뜻이 전달된다. 그리하여 남관의 ‘문자추상’은 무뚝뚝하게 말을 건네 은밀한 대화를 속삭인다.
남관은 1911년 경북 청송군 부남면 구천동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촌장을 지낸 아버지의 3남매 중 맏아들이었다. “손재주가 있었던지 아니면 장난꾸러기였던지, 종이나 땅바닥에 뭔가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의 그림이 칭찬 끝에 교실 벽에 붙는 일이 잦았다. 청송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열다섯 그에게 “너는 그림을 잘 그리니 소질을 살려 더 공부해 보라”는 당시 일본인 교장의 추천서를 들고 도쿄로 갔다. 1년의 입학 준비 후 와세다 중학교에 입학했고 3학년을 마치고는 계획대로 태평양미술학교에 들어갔다. 1935년에 졸업했지만 10년 더 일본에서 미술공부를 하면서 공모전에 출품해 상을 받는 등 ‘화가’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의 패전 소식을 도쿄에서 접했고 광복의 조국을 기뻐하며 즉시 귀국했다. 첫 개인전은 1947년에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의 동화백화점화랑에서 열었다. 일찍이 화단의 호평을 받았다. 당시 화풍은 서정적이고 향토적인 분위기의 구상회화였다. 치열하게 살던 중 또 전쟁이 터졌다. 종군화가로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고 온몸으로 겪은 그때의 상처가 평생의 작품 전반에 깔려 있다.
“나는 두 차례의 전쟁, 즉 제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동란을 겪었다. 숱한 사체, 숱한 부상자를 보았다. 그들의 비틀어진 얼굴들은 꼭 고성에 무너진 돌담 조각 같았고 오랫동안 흙 속에 파묻혀 있던 석기시대의 부서진 유물들이 마침내 대낮의 강렬한 햇볕에 드러난 흠진 자욱같이 보였다.”
부산으로 피난한 1952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절박한 순간이 화가의 눈을 ‘다시 뜨게’ 했다. 마침 일본에서 열리던 제 1회 일본국제미술전람회, 일명 도쿄 비엔날레 등을 통해 세계 미술계의 격동적인 변화양상을 접하고 “흥분할 만큼 자극을” 받았다. 나라가 전쟁일 때 작가의 마음 속은 ‘어떤 작품을 해야 하나’라는 고뇌로 또 다른 전쟁을 치렀다.
‘프랑스다!’ 남관에게 마음 속 외침이 들렸다. 그는 1954년 12월 일본에서 파리로 가는 배를 타기까지 온갖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때 ‘흙 속의 진주’같던 남관을 알아본 이가 있었으니, 백상 장기영 서울경제신문·한국일보 창업주였다. 생전의 남관은 “1949년 전시 때 장기영씨(당시 한국은행 재직)가 ‘호박을 이고 가는 소녀’를 사간 것이 기억난다”면서 “1954년에 서울을 떠나 일본 요코하마에서 파리행 배를 타고 가는 동안의 기행문과 데생을 한국일보에 기고했다”며 예술적 후원자와의 일화를 소개했다. 남관은 출국 직전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도불 기념전’을 열었고 서양화의 본고장으로 진출하는 제1호 화가를 후원하려 그림을 산 사람이 제법 많았다.
남관의 파리 행(行)은 성사됐으나 이후의 고난이 만만치 않았다. 수익금 3,000달러를 맡았다가 매달 50달러씩 학비로 송금해주기로 한 사람이 돈을 꿀꺽 삼켰다. 게다가 매달 100달러 지급 후원을 약속했던 당시 ‘아시아재단’이라는 곳에서도 소식이 끊겼다. 재료 살 돈도 없었다. 굶게 됐다. 화가의 자존심으로 버티다 “몽마르트에 나가 초상화를 그려주고 몇 푼씩 받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몽파르나스의 빈민 아파트에서 굶주리는 연습”을 했다. “토굴처럼 컴컴한 방안에서 귀신처럼 말라가는 중년의 한 사내가, 국제적 화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캔버스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대략 2년 동안 굶기를 밥 먹듯 했다. 감자와 우유만 먹었더니 머리가 다 빠졌다. 자신의 대머리를 가리키며 “고생스럽던 파리생활의 선물”이라고 해 주변 사람들을 웃겼다가 울렸다.
전환점은 한국인 최초로 1958년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 초대되면서다. ‘5월의 전시’라는 뜻으로 전후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술제다. 피카소는 1951년 이 전시를 통해 ‘한국에서의 학살’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다. 전성기의 서막이 열렸다. 1966년 피카소·뒤뷔페·타피에스 등 쟁쟁한 거장들이 참가한 망통회화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아 일약 스타가 됐다. 당시 수상작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은 이탈리아 트리노미술관에 소장됐다.
경쟁한 작가들의 현재 위상과 비교한다면, 남관이 유럽에서의 명성을 접고 귀국한 것은 안타까운 결정이었다. 1968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77년까지 홍익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70세까지 그린 작품이 대략 3,000점에 달한다.
남관은 환상적인 청색과 자색(紫色)을 좋아했다. 그의 작품에 푸른 색조가 많은 이유다. 신비로운 푸른빛은 희로애락의 복합적인 감정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평론가 조제 피에르는 “남관의 회화에서 우선 눈을 끄는 것은 고도의 세련된 색채이다…그가 보여주는 청록색의 반짝임은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의 ‘명상’을 유발하며 이는 그린다는 못지않게 삶의 행위와도 관련된다”고 했고, 파리 국립근대미술관장을 지낸 베르나르 도리발은 “투명한 무지갯빛”의 작품이 “동과 서의 문화적 ‘결혼’을 입증하는 셈”이라며 남관을 치켜세웠다.
그의 첫 부인은 원로 화가인 신금례(92) 씨다. 둘 사이의 외아들 남윤 씨가 남관의 고향 청송군과 기념관 성격의 문화센터 조성을 준비하고 있다. 화가가 프랑스로 떠나면서 부부 사이는 벌어졌다. 남관은 49세이던 해에 33세의 소설가 김진옥 씨와 재혼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구절로 유명한 시 ‘저녁에’의 시인 김광섭의 딸이다. 귀국한 화가와 문인 부부는 종로구 부암동 산 중턱에 파리의 화실 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1986년 원로화가 남관은 국제 사기사건에 휘말린다. 영국 국립미술관 격인 테이트갤러리 회고전을 기획한다며 해외 유명화랑 관계자를 사칭한 사람에게 작품 30점을 넘겼는데 예정된 전시가 3개월, 6개월 미뤄져 해를 넘긴 것이다. 국내 화가의 첫 테이트 개인전이라 언론에도 보도된 터였다. 파리의 작업실 정리차 떠난 부인 김진옥 씨가 런던에서 미술관에 문의했다가 “그런 전시 계획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경시청에 신고해 작품 회수를 시도했으나 이미 11점은 고가에 팔려있었다. 이름없는 화가에게는 통하지도 않았을 사기사건이었다. 남관이라면 해외 유명미술관이 개인전을 기획할 법했으니 속아 넘어간 셈이다. 생때같은 그림을 잃고 부인은 병을 얻어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남관 또한 1990년 도쿄 아트엑스포의 개인전을 준비하다 홀연히 영면에 들었다.
남관은 여름처럼 뜨겁게 살다 갔다. 그의 ‘환상’ 같은 이런 하늘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던가. 더듬게 한다. 언젠가 다시 볼 수 있는 하늘일까. 꿈꾸게 한다. 아, 옛 생각이 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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