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맑은 물에 옷 입은 채로 풍덩 뛰어들고 싶다. 수초가 파르란 물 사이로 잉어 네 마리가 미끄러지듯 헤엄치고 있다. 가마솥 더위가 연일 찜통을 만드니 잉어의 수중생활이 몹시도 부럽다. 물고기 덩치가 제각각인데 올망졸망 몰려다니는 것을 보니 가족인 게다. 가장 격인 큰 잉어가 식구를 감싸듯 이끌고 막내 같은 꼬맹이가 뒤를 따른다. 피둥피둥 살찌지도 않고 비실비실 힘없지도 않은 잉어 몸집이 맞춤하게 보기 좋다. 잉어 몸통이 갈색이라 푸른 물빛 안에서 더욱 격조 있다. 영롱한 눈동자와 투명한 비늘이 반짝인다.
물고기의 생기는 눈동자요 기품은 비늘에 있다. 날렵한 먹선으로 동그랗게 눈을 그린 다음, 아주 옅고 조금 도톰한 담묵(淡墨)으로 그 안쪽을 한 번 더 두른 후에, 한가운데 까만 눈동자를 콕 박았다. 그리하여 눈동자 주변이 상대적으로 더 하얗게 보이니 초롱초롱 영민한 눈을 이뤘다. 얇지만 탄력 있는 비늘은 등줄기서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진한 먹을 붓 중간까지 찍어 갓난아이 손톱 같은 비늘을, 하나하나 꼬리까지 찍었다. 이번엔 물을 조금 더 묻혀 그 아래 한 줄을 더 찍었다. 붓질을 거듭해 등에서 배로 갈수록 비늘색이 옅어진다. 손으로 만져짐 직한 입체감을 얻었다.
화가가 그림 그리던 날도 요즘처럼 무척 더웠을까, 그도 더위 못 이겨 물 안에 얼굴 집어넣었다가 이 잉어들을 만난 것 아닐까. 물속 들여다보느라 물결 그리는 일을 내팽개쳤다. 노니는 잉어를 물 밖에서 볼 때 생기는 시각적 굴절이 없어, 해 본 상상이다. 조선의 옛 그림에서는 눈으로 본 사실성보다 기운으로 드러내는 본질이 더 중했으니 일렁이는 물 아래 잉어 형태의 왜곡이 ‘시적(詩的) 허용’처럼 생략된 셈이다. 그 덕에 잉어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하늘을 떠다니는 듯 자유로워 보인다.
조선 화단 최후의 대가로 불리는 소림 조석진(1853~1920)이 헤엄치는 물고기떼를 그린 ‘군어유영(群魚游泳)’이다. 잉어 그림은 과거급제와 출세를 기원하는 길상화(吉祥畵)다. 잉어가 황하 상류의 거센 물길을 오르면 용이 된다는 중국의 등용문(登龍門) 고사 때문이다. 이따금 흰 배를 보이며 까무러치듯 뒤집힌 물고기 그림을 볼 수도 있는데 놀랄 일은 아니다. 활처럼 휘어 솟구치는 형상이다. 잉어가 물길 거슬러 오르려면 그 정도로 거센 도약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조석진의 다른 물고기 그림으로 ‘수초어은(水草魚隱)’이 있다. 매끈한 쏘가리 두 마리가 수초 사이에 몸을 감췄고 그 뒤로 치어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먹칠한 자리에 덧칠 얹어 윤곽선을 없애 버리는 파묵(破墨)과 자연스럽게 먹이 번져가는 발묵(潑墨)을 자유자재로 휘둘러 쏘가리의 특징인 얼룩반점을 만들었다. 잉어의 총총한 비늘과는 사뭇 다른 멋이다. 묘사는 정밀하고 필치는 숙련됐다. 그러나 화가의 붓질은 시대와 분리될 수 없다. 어딘지 모르게 물고기의 모습에서 무력함이 느껴진다. 속되게 비유하자면 꼭 회접시에 놓인 생선 같다. 솟구칠 기세는 고사하고 저항할 여력도 없는 듯하다. 백인산 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생동감이 부족한 물고기는 마치 박제를 보는 듯해 길상적 의미 이상의 감동은 주지 못한다”면서 “소림의 실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조선 말기의 문화 역량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평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이들 작품은 DDP에서 열리고 있는 ‘조선 최후의 거장 장승업’전(展)에도 나왔다. 최고의 컬렉터 간송 전형필(1906~1962)과 조석진의 인연은 독특하다. 인물화에도 뛰어났던 조석진이 중국의 고사를 소재로 그린 12폭 병풍이 간송의 돌사진에 등장한다. 학식과 인품이 뛰어나고 예와 풍류를 아는 그림 속 선인들이 아이를 감싸 안은 격이다. 이 작품은 서화에 조예 깊은 간송의 선대 때 수집된 것이니 조석진이 당대 얼마나 명성을 떨쳤는지 짐작하게 한다. 간송 또한 그림 병풍 세워준 어른들의 바람대로 자랐다.
조석진의 그림 실력은 대물림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도화서 화원을 지낸 임전(琳田) 조정규(1791~?)다. 조석진은 황해도 강령, 지금의 옹진에서 1853년에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 손에 자랐다. 조정규가 특히 물고기와 기러기 그림으로 이름 날렸는데 조석진이 그 재능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키워만 준 게 아니라 학문과 그림도 가르쳐 준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담아 자신의 호를 ‘작은 심전’이라는 뜻의 ‘소림(小琳)’이라 지었다. 시골에 살던 소림은 아들 없는 먼 친척 조성완이 양자로 입양하고 싶다 하여 1880년 즈음해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로 오면서 그의 재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1881년 9월 김윤식이 이끄는 영선사 일행으로 청나라 톈진에 파견됐다. 당시 개항에 뒤따른 자강정책으로 정부에서 장차 받아들여야 할 새 문물을 배우고자 일본에는 신사유람단을, 청에는 영선사를 파견한 터였다. 심전 안중식(1861~1919)을 이때 만났고 이후 늘 함께 했다. 안중식은 정통 도화서 출신이었고 조석진은 집에서 배운 그림을 실력이 뛰어나 도화서 일에 합류하게 됐다. 조선 말 최고의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1843~1897)은 도화서에서 만나 스승처럼 따랐다. 조석진이 즐겨 그린 신선 그림과 장식성 강한 설채법, 구도 등에서 오원의 영향이 감지된다. 하지만 기인 장승업과 달리 소림의 화풍은 부드러움과 차분함을 보인다. 1900년에는 최고의 초상화가 채용신(1850~1941)과 함께 ‘영조 어진’(보물 제932호)을 그렸다. 1902년에는 재위 40주년을 맞은 고종의 초상작업을 주도할 어진화사로 조석진과 안중식이 나란히 뽑혔다. 화가로서 최고의 영예였고 둘은 당대 최고의 화가로 도약해 20세기 초 한국 화단을 이끈다.
조선의 봉건적 신분제도가 무너지면서 새롭게 부유층이 등장하던 당시는 그림 수요층이 넓어지며 본격적으로 미술시장이 형성되던 때다. ‘마지막 도화서 화원’인 두 화가는 1911년 이왕가(李王家) 후원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전문교육기관인 경성서화미술원에서 후진을 가르쳤다. 조석진이 어떻게 그려야 하느냐고 묻는 제자에게 “그림을 손을 붙잡고 가르쳐 주면 어떻게 하느냐? 평생 남에게 물어가면서 그릴 셈이냐? 며칠이 걸려도 좋으니 혼자 생각해 보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엄한 스승이었다. 안중식의 제자로 심산 노수현이 서울대 동양화과, 청전 이상범이 홍익대 동양화과를 각각 창설해 한국 현대 동양화단을 개척한 것과 달리 조석진은 자신의 화파를 만들지 않았다. 다만 그 피를 이어받은 외손자 소정 변관식(1899~1976)이 호방하고 활달한 그림들로 근대 화단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한편 조석진과 안중식은 1918년에 미술발전을 도모하며 서화협회를 조직했고 연배 어린 안중식이 초대 회장이 됐다. 그런데 이듬해 안중식이 사망했고 2대 회장으로 뽑힌 조석진도 다음 해인 1920년에 세상을 떠났다. 서화학원은 1925년에 후원이 끊겨 문을 닫았고 서화협회는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이 극에 달했던 1937년에 외압으로 전시가 무산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쇠락하는 왕조, 요동치는 국가에서 살았고 망국의 설움 안은 채 눈을 감았다. 말 못한 현실에 대한 갈증이 딴 세상 신선을 동경하는 그림으로, 용 되어 승천하길 꿈꾸는 잉어 그림으로 탄생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내가 사랑한 미술관-근대의 걸작’전에서 만날 수 있는 ‘노안’은 그런 세상에 전하는 화가의 선물이다. 갈대 노(蘆) 자에 기러기 안(雁) 자를 쓴 ‘노안’은 늙어(老)서도 평안(安)하라는 ‘노안’과 발음이 같다. 바람을 담은 축복의 그림이다. 담묵의 몸통에 깃털을 찍되 군데군데 진한 먹으로 반점을 그려 생기를 더했다. 기러기 눈 주위를 흰 안경 씌운 듯 하얗게 남기고 눈동자를 찍었다. 채색 없는 먹그림만으로도 갈대의 사각거림이 느껴진다. 그 사이로 불어나온 바람에 땀이 식는다. 왼쪽 위에 ‘평생 주변 모두를 형제처럼 대하고 만 리 밖 구름 사이를 날개 하나로 오간다(百年海內皆兄弟 萬里雲間一羽毛)’고 적혀있다.
나중 사람들은 어쩌면 지금을 가리켜 백여 년 전 개화기 못지않은 격변기라 할지 모른다. 늙어서(老)뿐 아닌, 지금 모두의 평온을 빌어본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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