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6년 8월10일 새벽1시 무렵 미국 항공기 제조사 시코르스키의 개발담당 중역이던 레이 레오니는 군 당국으로부터 긴급한 전화를 받았다. 이 회사의 신형 헬기 시제품이 전날 밤 추락했다는 내용이었다. 헬기 주날개의 로터블레이드에 문제가 발생해 비행 도중 수십 미터 밑으로 처박혔다. 그런데도 추락 현장에는 폭발 흔적이 없었다. 심지어 동체 자체가 거의 멀쩡했다. 로터블레이드 등만 일부 교체한 뒤 이튿날 곧바로 다시 날아올랐을 정도다. 14명의 탑승자의 부상도 몸에 약간 멍이 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사고로 오히려 시제품의 안전성이 입증돼 미군의 차기 헬기로 최종 낙점됐다. 바로 ‘블랙호크’ 헬기다.
이와 대비되는 비극이 7월 국내에서 발생했다. 해병대에 납품된 국산 헬기 ‘마린온’이 정비 후 시험비행 중 수초 만에 주날개 블레이드가 떨어져나갔다. 결국 약 10m 높이에서 추락해 폭발했다. 탑승 장병 6명 중 5명의 귀중한 목숨이 산화됐다. 마린온의 좌석은 충돌 충격을 어느 정도 감쇄하는 구조로 설계돼 있다. 따라서 폭발·화재만 없었다면 불과 10m 높이에서 추락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즘 군용 헬기는 웬만한 충격으로는 폭발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동체의 프레임과 연료 계통이 잘 부서지지 않도록 높은 내구도로 제조된다. 피탄이나 충돌로 연료통에 균열이 발생해도 끈적한 물질이 자동으로 흘러나와 즉시 외부 산소와 내부 연료의 접촉을 막는다. 실제로 미군 블랙호크 2대가 1993년 10월3일 소말리아에서 작전 도중 로켓탄에 맞아 추락(‘블랙호크 다운’ 사건)했지만 당시에도 기체가 피탄 및 추락의 충격으로 폭발하지는 않았다. 이후 전소한 것은 현지의 극렬분자들이 추락한 헬기에 몰려드는 가운데 인위적으로 방화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국산 헬기인 수리온에도 내충격체계(CRFS)와 자동소화 기능 등이 적용돼 있다. 마린온은 수리온의 파생형 헬기다. 그럼에도 초저공 추락의 충격을 견디지 못해 몸체가 동강 나고 폭발로 전소했다는 점은 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설계 결함 등 연구개발(R&D) 과정의 문제이든지 제조상의 문제로 추론될 수밖에 없다. 책임 소재를 가려 관계기관이나 제조사를 엄중히 문책해야 한다. 국방기술품질원이 제 역할을 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몇 년 새 K-9 자주포 폭발화재 사고, K11 복합형 소총 폭발 사고, K-21 장갑차 침수 사고를 비롯해 무기체계의 국산화 과정에서 인명사고가 잇따랐다. 우리 군이 무기체계 도입 시 군 장병의 생명보다 화력과 기동력, 경제성, 운용 편의성에 치중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이번 기회에 군용 장비의 개발 및 조달 과정을 구조적으로 개선해보자. 새 무기에 대한 소요제기 단계부터 높은 ‘생존성’과 ‘안전성’ 지표를 도입해 심사 통과의 핵심 요건으로 못 박도록 하자. 또 R&D, 양산, 실전 배치, 정비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해당 지표의 요건이 달성됐는지 주기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무기체계의 품질 및 안전 검증을 하는 조직의 ‘독립성’ ‘전문성’도 한층 강화할 것을 제언한다. 안전 및 생존성 시험용 설비에 부족함이 없는지도 따져보자. /newsroo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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