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더우시죠? 아이스박스에 시원한 맥주가 있는데….”
지난 3일 강릉시 경포해수욕장 백사장. 20대 초반 여성들 주변을 맴돌던 남성 2명이 귓속말로 속삭인다. 한 남성이 조심스레 여성들을 향해 부채질하며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이어 아이스박스에 담긴 맥주를 보여주자 어색한 분위기도 잠시, 낯선 남녀 사이에는 어느새 웃음꽃이 폈다.
같은 시각 백사장 한쪽에서는 반바지 차림의 경찰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휴가철 피서지에서는 ‘몰카’를 비롯해 성폭행을 염두에 둔 ‘헌팅’까지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심영빈 경포 여름경찰서 순경은 “여름 휴가철에는 일 평균 최소 24건에 이르는 신고가 꾸준히 접수돼 쉴 틈이 없다”고 말했다. 경포 여름경찰서 경찰들의 하루를 서울경제신문이 동행 취재했다.
◇‘대포 카메라’ 든 70대
‘출입금지 불법카메라 점검 중’. 3일 오후3시께 경포해수욕장의 한 여성 화장실 앞에 입간판이 설치됐다. 손님들이 빠져나가자 여경 2명과 관동대 경찰행정학과 학생들이 전파·렌즈탐지기로 화장실 내 구멍과 나사를 집중적으로 살폈다. 이들은 해수욕장 내 탈의실 15곳과 화장실 2곳을 점검했다. 다행히 발견된 몰카는 없었다. 점검을 마친 뒤 땀범벅이 된 학생들은 “매일 해수욕장은 물론 인근 상가까지 점검하는데 범위가 넓어 힘에 부친다”면서도 “몰카 범죄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래도 보람은 느낀다”고 밝게 웃었다.
이 같은 노력에도 휴가철 몰카 범죄는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다. 지난달 중순께 강릉경찰서는 경포해수욕장에서 DSLR 카메라로 여성 신체를 찍은 A(72)씨를 붙잡았다. A씨의 카메라 렌즈가 자신의 신체를 겨냥한다고 느낀 여성이 경찰에 신고해 붙잡힌 것이다. 당시 A씨는 “해변 풍경을 찍다가 우연히 여성의 신체가 담겼을 뿐”이라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밤의 1대 3 추격전
2일 새벽 골든튤립스카이베이경포호텔 앞 도로에서 때아닌 1대3 폭행이 벌어졌다. 술자리를 파하고 흥이 올랐던 B(24)씨가 해변에서 소리를 지르자 21세 또래 3명이 “왜 소리 지르냐”며 따져 물어 시비가 붙은 것이다. 먼저 주먹을 휘두른 B씨는 수적 열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도망가다 호텔 앞에서 붙잡혀 흠씬 두드려 맞았다. 곧이어 신고를 받은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자 체포가 두려웠던 B씨는 도망치다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지난달 6일 해수욕장 개장 이후 지난 3일까지 발생한 폭행사건은 133건이다.
◇토사물에 드러누운 주취자
“악” 주취자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전창구 경장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만취한 20대 남성이 휘두른 주먹에 맞은 것이다. 해변에서 행인에게 시비를 걸다 경찰서로 옮겨진 남성은 5분간 괴성을 지르다 별안간 경찰서 바닥에 토사물을 게워내고는 엎어졌다. 머잖아 남성은 출동한 구급차에 실려갔다. 전 경장에게 괜찮으냐고 물으니 “이런 경우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입건할 수 있지만 신고 피크시간대라 원활한 업무 진행을 위해 넘어갔다”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잠 좀 잡시다” 주민 몸살
피서객의 난폭·음주운전도 기승을 부렸다. 4일 오전2시에는 20대 남성 C씨가 경포호 인근 일방통행로에서 후진하다 뒤에서 오던 차량과 접촉사고를 냈다. 당시 C씨의 혈중알콜농도는 0.1%로 면허취소 수준이었다. 7월6일부터 지난 2일까지 강릉경찰서에 접수된 교통사고는 총 90건으로 2년 전 같은 기간의 67건보다 34%나 늘었다. 한밤의 백사장은 모두 흡연구역으로 변했다. 열대야를 피해 바닷가를 찾은 강릉시 주민 최모(36)씨는 “더위에 아기가 통 잠을 안 자 해변에 데려와 재웠는데 담배 연기 때문에 괜히 데려온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기분 좀 내려고” 민폐 폭죽족
4일 오전3시께 별안간 순찰차가 야간 경광등을 켜고 출동했다. 해변에 도착하니 40개를 웃도는 폭죽이 불길을 뿜어냈다. 경찰이 경범죄 위반으로 범칙금 ‘딱지’를 떼려고 하자 한 남성은 “아내 생일이라 기분을 내려고 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이내 경찰은 백사장을 한 번 둘러보고 ‘자제하라’는 경고만 남긴 채 발길을 돌렸다. “왜 그냥 돌아가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경찰은 “한 사람을 단속하게 되면 형평성 차원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전원을 잡아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당시 백사장에는 줄잡아 열 무리 이상이 폭죽을 터뜨리고 있었다.
4일 오전5시30분께 경포 해변으로 한 줄기 햇빛이 떠올랐다. 밤새 해수욕장을 가득 메웠던 청춘들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웠다. 경포 여름경찰서의 경찰들은 그제야 기지개를 켰다. 그들 앞으로 전광판의 문구가 빛났다. “슈퍼맨은 우주에 경찰은 가까이!!”
/글·사진(강릉)=서종갑·박진용기자 gap@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