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슬 퍼렇던 더위가 세월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새벽 바람에 살갗이 느끼는 딱 그 차가움 만큼의 파르람이 화폭을 채운 윤중식(1913~2012)의 ‘아침’이다. 나뭇가지에 잎사귀 하나 없는 것을 보면 겨울인가 싶기는 하나 저쪽에서부터 둥글게 올라오는 태양의 노란빛이 온화한 분위기를 내뿜어 춥지 않고 그냥 선선한 정도로 느끼게 한다. 멀리 초록의 능선을 따라 여명이 노란색 띠를 이뤘다. 산과 맞닿은 자리는 좀 어둡게, 산 아래쪽 그림자 자리도 청회색 띠가 드리웠다. 벌판을 건너온 아침의 기운은 담장에, 담 아래에, 마당에, 계단에 수평으로 층층이 “내 곧 가리다” 기별 보낸다. 그렇게 시간은 층층이 내려앉는다. 아침의 동터오는 풍경도 수평선이나 지평선, 혹은 산의 능선과 건물 숲의 빈자리를 따라 가로로 널찍하게 빛을 퍼뜨리며 찾아온다. 화가 윤중식에게 시간과 빛이 그려낸 풍경은 그렇게 ‘수평층’을 이뤘다. 그가 즐겨 그린 아침·황혼·석양·강변·태양, 그리고 일련의 계절 풍경화는 한결같이 겹겹이 층을 그린다. 고고학 발굴현장에서도 쌓인 흙의 층위를 근거로 시대를 추정하니, 그게 시간의 속성일까. 아니면 심성 고운 화가의 눈이 하늘 한 조각, 들판 한구석, 나무와 숲과 풀 한 포기까지 찬찬히 쓸며 바라본 탓에 한 겹 한 겹 각자의 자리를 ‘층’으로 차지한 것일까. 아침도 노을도 아련하게 떠오르고 아득하게 잠긴다.
윤중식은 1913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이해를 위해 비교해 보자면 김환기(1913~1974)와 같은 해 났고, 이중섭(1916~1956)이 고향 후배다. 정미소를 운영하던 부친이 아홉 남매가 뛰어놀아도 좁지 않아야 한다며 기와집 3채를 터서 생활했으니, 꽤 부유했다. 여섯째이자 차남이던 그는 누나들이 음악을 전공해 악기를 접할 일 잦았고 한때 작곡에도 관심을 뒀다. 하지만 미술대학으로 그를 이끈 결정적 계기는 아버지의 친구 김관호(1890~1958) 화백의 부추김이었다. 숭실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윤중식은 2학년이던 1931년 미술 등용문이던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응모했고 소녀와 풍경을 그린 유화 두 점이 모두 입선했다. 이듬해, 또 그다음 해까지 3년 연속 입선하니 술 마시러 집에 들른 화가 친구에게 아버지가 그만 ‘아들 자랑’을 했던 것이다. 소년은 자연스럽게 화가로 인생의 항로를 확정했다. 일본 도쿄의 데이코쿠미술학교 서양화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도쿄에서 공부하던 조선인 미술학도들의 결속체였던 백우회(白牛會)에서도 이중섭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40년에 졸업하고 1942년 조선미술전에 출품한 ‘석양’이 입선했다. 저녁 햇살이 눈부신, 평화로우면서도 향토적인 석양 풍경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전하지 않으나 그때부터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색조와 정취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광복이던 1945년 서울에서의 첫 개인전 때 평론가인 고(故)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작품 전반에 시적 정서가 넘쳐 흐른다”고 평했다. 화풍으로는 앙리 마티스의 야수파를 떠올리게 하는데, 실제 미술대학 재학 시절의 일본인 선생이 마티스의 제자였다고 한다. 풍경화에서는 인상주의적인 붓질이 감지되고 인물화 등에서는 조르주 루오의 강인한 검은 윤곽선이 뿜어내는 힘이 느껴진다.
화가의 인생 전환점은 6·25전쟁과 그로 인한 월남과 가족과의 생이별이다. 1·4후퇴 때 온 가족이 피난길에 올랐는데 황해도 해주 근처에서 그만 부인과 여섯 살 난 딸 혜경이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풍경과 정물, 새 그림 외에 윤중식이 종종 그린 인물화 속 여인과 소녀의 얼굴에 드리운 애잔함의 근원이 아마도 그 이별인 듯하다. 그는 홀로 큰아들의 손을 잡고 젖먹이 둘째 딸을 업은 채 남쪽을 향해 걸었다. 어린 것은 못 먹고 앓다가 결국 흔들어도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부산까지 손목 꼭 붙들고 함께 내려온 아들 대경 씨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됐다.
1953년 휴전 직후 윤중식은 서울에서 재개된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출품한 ‘가을 풍경’이 특선을 받으며 작가적 역량을 널리 알렸다. 그렇게 국전에서 몇 번의 입선을 거듭하니 1959년부터는 국전 추천작가 위치에 올랐다. 화가로 살았을 뿐 아니라 교직에도 몸담았다. 창덕여고에서는 학교 측의 배려로 소강당 한쪽에 작업실도 얻었다. 이후 이마동(1906~1981)의 추천으로 홍익대 교수가 됐다. 이때부터 그의 깐깐한 성격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까칠하다기 보다는 곧고 맑은 성품이었던 것인데 그때만 해도 입시 청탁, 심사 부정 등이 제법 있던 시절 윤중식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학교 밖에서는 절대 미대 입시준비생의 그림을 봐주는 일이 없었으며 오로지 작품만 놓고 사흘 밤낮을 고심해 채점하곤 했다. 어떤 이들은 홍익대 미대가 명성을 쌓은 계기 중 하나가 윤중식 교수의 엄격한 심사 덕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윤중식은 1963년부터 성북동에 둥지를 틀었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거나 “금방 따낸 돌온기에 입을 닦는” 존재는 시인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만이 아니었다. 윤중식 또한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살았다. 그는 자신보다 더 나이 많은 큰 소나무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아들네 집을 핑계로 옆집까지 사들였다. 이산의 자신이 이식(移植)된 존재였기에 그 나무를 옮기는 게 그리도 싫었던 모양이다. 종종 야외로 나가 이젤을 세워놓고 사생하며 그림을 그릴 때도 풍광을 앞에 둔 그의 마음 속에는 고향 대동강변이 아른거리곤 했다. 그가 그린 풍경화의 수평층이 단단해진 것은 누르고 누른 그리움이 굳어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그림 중에 비둘기를 소재로 한 작품도 많다. 어릴 적 정미소를 하던 집에서 누룩공장도 운영한 덕에 주변 비둘기들이 잔뜩 모여들었고 그 비둘기를 가까이서 살펴보며 키웠던 기억이 자꾸만 그림으로 이어졌다. 물론 비둘기는 전쟁세대인 그에게 평화와 자유의 상징이기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파랑새’는 70세의 화가가 마침내 발견한 희망의 파랑새를 온화한 정물과 더불어 담고 있다.
“가을은 낭만과 애수와 기대의 계절, 천공을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들은 끊임없이 생과 자유의 갈망을 우리에게 계시하며 사라진다. 먼 하늘과 깊은 숲과 찬란한 황혼이여! 맑은 가을이여! 길이길이 나에게 진실과 사랑과 믿음을 주소서.” (1975년 계간지 ‘화랑’ 여름호에 쓴 윤중식의 글 중에서)
1990년대 초 그의 집에 도둑이 들어 벽에 걸어둔 그림들을 죄다 도난당했다. 그림값이 워낙 고가였던 터다. 사실을 안 작가가 맨 먼저 한 일은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벽에 나란히 걸어둔 그림이 두 손녀의 초상화였는데 애들이 그림 없어진 것을 알면 속상해 할까봐 눈치채기 전에 다시 그린다며 분주했던, 정 많은 할아버지였다.
아들 내외가 지금도 살고 있는 오래된 집에는 한 번도 전시한 적 없는 작품 뭉치가 담긴 스크랩북이 있다. 피난길에 간신히 구한 종이에 연필과 수채물감으로 급히 그린 피난 풍경이다. 길게 늘어선 피난 행렬, 길에 앉아 젖 먹이는 엄마, 총질하는 군인 등이 등장한다. 피난길에 인민군에게 잡혔다 풀려나고, 국군을 만나 태극기 아래 선 남자의 등에는 분홍 포대기에 싸인 아이가 업혀있고 손끝에 꼬마가 매달려 있다. 화가의 자화상이요, 경험담이다. 빠른 필치로 순간의 분위기를 잡아챘다. 현란한 붓질 사이에 잊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읽힌다. 오래된 그림이 지금도 생생한 것은 그 아픔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2000년 갤러리현대에서 연 88세 미수전(米壽展)과 2012년 성북구립미술관에서 개최한 100세 상수전(上壽展)에서도 신작을 선보인 화가는 세상 떠나기 전날까지도 그림을 그렸다. ‘또 오겠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결코 어기는 법 없는 아침의 태양, 변치 않는 석양과 자연 등 작은 그림 몇 점이 미완성으로 남았다. 아마도 고인은 새가 되어 대동강 변 고향 집 주변을 휘익 돌아본 후 소천(召天)하였으리라. 시간은 힘이 세다. 가을이 왔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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