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중국 경제로 집중되는 듯 보였던 미중 무역분쟁의 충격이 미국 산업 전반에 걸쳐 기업 실적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오랜 호황을 이어온 미국 경기가 정점을 찍은 것 아니냐는 공포가 금융시장을 맴돌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거듭되는 금리 인상 행보에 10년 전 미국 금융위기의 진원지였던 부동산 시장도 흔들릴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더욱이 신흥국 시장 불안에 이어 회복세를 보이던 유럽 경제도 성장세가 둔화될 조짐이 나타나는 등 글로벌 경기 여건도 녹록지 않아 세계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던 미국 경제마저 위축될 위기 요인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 뉴욕 증시가 24일(현지시간) 2주 만에 재차 급락해 3대 지수가 올해 상승분을 모두 반납한 데는 그간 미국 경제의 기관차 역할을 해온 애플·구글·아마존 등 실리콘밸리 대형 기술업체들의 향후 성장이 둔화하며 실적이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방아쇠 역할을 한 것은 정보기술(IT) 업체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고 있는 반도체 회사들이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와 AMD는 이날 3·4분기 실적을 발표하며 무역분쟁 여파로 중국발 반도체 수요가 부진해 향후 매출 및 수익이 악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로 인해 TI(-8.22%)와 AMD(-9.17%)는 물론 미 반도체업체 대부분의 주가가 급락했고 아마존(-5.9%), 구글(-5.2%), 애플(-3.4%) 등도 줄줄이 추락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수년간 세계 경제 여건과 관계없이 매출을 늘려온 미국 IT 기업들이 무역전쟁 속에 실적이 정점을 찍었을 수 있다는 우려가 겹치자 투자 심리가 급격히 악화했다”고 분석했다. 전날 세계 최대 건설장비업체인 캐터필러도 관세 장벽으로 인한 비용 증가와 중국 판매 부진을 우려하며 제조기업들의 실적 둔화 우려를 부추긴 데 이어 무역전쟁의 파고가 반도체와 IT 등 산업 전반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불안감이 시장을 뒤덮은 것이다.
특히 10년의 강세장 속에서 불안감이 적지 않은 미 증시에서는 “기업 실적이 정점에 올라섰고 경기도 고점을 지나고 있다”는 공포감이 팽배해 한 차례 붕괴 수준의 폭락장이 연출될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제리 바라크맨 퍼스트아메리칸트러스트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많은 불확실성이 제기되면서 시장 곳곳에서 공포 요인이 커지고 있다”며 “투자자들이 정말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연준이 이날 공개한 경기평가 보고서인 베이지북도 “기업들이 관세로 철강 등 원자재 가격이 상승해 최종 제품 가격을 올려야 하는 압박을 받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 같은 우려에 기름을 부었다.
베이지북은 미 경기 확장세가 이어지고 있다면서도 관세 부과에 따른 철강 등 원자재 비용이 높아지고 있다며 제조 기업의 비용 압박이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것임을 경고했다.
금융뿐 아니라 부동산 시장의 불안도 만만치 않은 형국이다. 미 상무부는 이날 9월 신규 주택판매가 전월 대비 5.5% 감소한 55만3,000가구에 머물렀다고 밝히며 8월 판매는 당초 62만9,000가구에서 58만5,000가구로 하향했다. 연준의 금리 인상이 본격적으로 부동산 시장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여기에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경제 성장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는 지표도 이날 발표돼 글로벌 경기둔화로 인한 미 경제 부담을 가중시켰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최근 무역전쟁 악영향 등을 꼽으며 내년 세계 경제성장률을 0.2%포인트 내린 전망치가 현실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금융정보업체인 IHS 마킷은 유로존의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합한 10월 구매관리자지수(PMI)가 52.7로 전달보다 1.4포인트 하락했다고 전했다. 미 경제매체인 마켓워치는 “이탈리아와 유럽연합(EU) 간 예산안 충돌과 영국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 협상 불확실성, 사우디아라비아의 언론인 살해로 인한 중동 정세의 혼란도 미국 경제의 불확실성을 높이며 투자 심리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편 세계적인 투자가인 짐 로저스가 최근 베이징에서 열린 한 비공개 투자포럼에서 미국 주식의 장래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고 중국 경제매체인 경영망이 25일 전했다. 올해 미국 증시의 상승이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인위적 재정부양 정책의 영향이라고 분석해온 로저스는 포럼에서 최근 폭락 직전까지 사상 최고 수준까지 오른 미국 주식이 고평가됐다며 미 증시에 대해 비관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뉴욕=손철특파원 runiro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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