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새벽, 5시에 맞춰놓은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와이프도 그 날 할 일을 의식한 듯 가볍게 일어났다. 용문5일장이 서는 날이다. 지난 주말 장날, 김장 배추를 사러 갔다 허탕을 쳤는데 주인 할아버지가 아침에 오라는 말에 서두르게 됐다. 때가 때인 만큼 겨울배추는 발 빠른 임자들 차지다. 어둠이 채가시지 않은 장터엔 상인들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장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두리번거리며 배추 파는 할아버지 부부를 찾았다. 지난해에도 그 분들한테서 배추를 산 것 같다는 와이프는 그 기억을 되살려 쉽게 알아챘다. 이번은 지난해보다 2배나 많은 150포기를 샀다. 7포기를 담은 1망에 1만2천 원 정도 했다. 할아버지가 1,000원 깎아주려는데 할머니께서 정색을 하신다. 속으론 원망도 했지만 그 마음만으로 2천원 더 싸게 산 느낌이다. 상쾌한 기분으로 배추를 차에 한가득 싣고 집으로 가는데 올 김장은 더 맛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올해 김장은 처형 가족들, 큰 처남이 함께해 배추 포기수가 그만큼 더 늘었다. 이렇게 모이게 된 이유는 단지 귀촌한 집에서 김장하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겠나하는 마음들이 일치한 결과다. 늘 시골 어머니 집에서 얻어먹기만 하다 직접 김장을 담구려니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신경 쓰인다는 며느리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정반대로 처가 식구들을 오롯이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그날 오후 처가 식구들이 몰려들어 김장 절이기가 시작됐다. 저녁 늦게까지 작업이 이어졌다. 남자들은 무채를 써느라 팔이 후덜덜 해질 정도였다. 오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엄포에 ‘김장뒷풀이’ 1차는 소박하게 끝냈다. 드디어 빅데이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따뜻한 햇살이 쏟아졌다. 밤새 소금에 푹 절인 배추는 방금 머리를 감은 것처럼 착 달라붙었다. 소금기를 씻어내는 과정은 3차 공정으로 진행됐다. 남자 3명이 큰 물통 3개를 나눠 소금기를 빼는 과정이다. 물을 버리고 다시 담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앉았다 일어섰다하다 보니 허리가 말이 아니었다. 오후쯤 끝나겠지 했던 김장 담그기는 저녁이 돼서야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빨간 양념을 버무린 배추김치, 파김치, 그리고 무소박이까지. 세상 모든 걸 얻은 기분이다. 김장의 효과는 이것 말고 더 있다. 요즘은 좀 달라졌다고 하지만 명절이 되면 늘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남자들은 밥상머리에 앉아 술잔을 돌리거나 할 일 없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 말이다. 하지만 김장을 할 땐 180도 달라진다. 오히려 남자들이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말 그대로 ‘동일노동’이다. 차별 없는 공평한 세상이다. 그래서 서로의 고충을 이해하고 수고했다며 다독여 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함께 라디오를 듣고 가벼운 농담도 하면서 한바탕 토크쇼를 벌이는 무대이다. 고춧가루 범벅이 된 물통과 배추 찌꺼기로 뒤덮인 데크 청소는 나의 몫이지만 정성이 듬뿍 담긴 김치는 우리가 함께 누릴 몫이다. 온 가족이 모여 퍼뜨리는 해피바이러스는 내년 이맘때쯤 다시 찾아오겠지? /최남호기자 yotta7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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