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온서는 ‘사기’의 ‘혹리열전(酷吏列傳)’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혹리는 엄격하고 분명한 법 집행으로 정책을 시행하는 관리를 일컫는다. 한비자로 대표되는 법가의 전통을 이어받아 가혹하고 철저하게 법을 시행했다. 왕온서가 하내 태수를 지낼 때는 처형당한 사람들의 피가 십 리에 걸쳐 흘렀을 정도였다고 한다. 혹리의 대척점에는 유가의 온정주의의 입각해 덕치를 추구하는 순리(循吏)가 있다. 사마천은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은 혹독한 법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에 있다”고 천명했다. 혹리보다 순리가 윗길이라는 것이다.
정부가 공권력 확립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을 보면서 2,000년 전 사람인 왕온서가 떠올랐다. 덕치를 추구하는 순리로 알았던 총리와 치안 담당 장관이 한목소리로 법치주의를 강조해서다. 민주노총 노조원이 지방노동청을 불법으로 점거하고 기업체 임원을 폭행하는 등 법질서를 훼손하는 일이 연이어 발생했는데도 경찰이 미온적으로 대처하면서 ‘공권력이 물러터졌다’는 비판이 거세지만 엄밀히 말해 지금은 공권력이 무너진 상황이 아니다. 권위가 실추되고 국민 신뢰가 떨어졌을 뿐이다. 이는 사법부와 경찰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재판거래 같은 사법 농단 사건을 보며 국민들은 참담해하고 있다. 경찰이 ‘비례의 원칙’에 따라 정당하게 공권력을 행사했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과잉 진압’으로 볼 만한 사례가 많았던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정권의 이념과 무관하게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공권력이 일관되고 엄정하게 집행돼야 한다. 그렇다고 법치가 ‘전가의 보도’는 아니다. 법치 역시 도덕과 인권의 기반 위에서 운영돼야 한다. 우리는 과거 법치주의를 내세워 시민의 인권을 짓밟고 생명을 손상하는 일을 숱하게 봐왔다. 법치는 실상 정권의 안위와 개인의 출세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 경찰 지휘부는 혹리보다는 순리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 3일 취임한 원경환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시민 인권 보호를 모든 경찰활동의 최우선 가치이자 행위규범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시대적 흐름에 부합하고 올바른 방향이다. 공권력을 바로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숙한 시민의식과 함께 인권을 최우선시하는 경찰권 행사가 전제돼야 한다. 이왕 공권력을 재확립하겠다고 한다면 집단민원 현장 대응 매뉴얼이나 경찰의 물리력 행사 기준을 제대로 정립하고 현장에서 엄정하게 실행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당한 공권력을 집행한 경찰이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하고 혹여 문제가 발생하면 지휘부도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인의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고 형벌은 나라를 다스리는 끝이다. 나라를 다스리면서 형벌이 있는 것은 마치 마차를 몰 때 채찍이 있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모두 교화를 따르므로 형벌은 행할 일이 없다. 말이 그 능력을 다하면 채찍 또한 쓸모없게 된다.” 당 태종의 ‘정관의 치’를 뒷받침한 위징의 말이다. 더 보태고 뺄 것이 없다. /sain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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