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서방의 제재를 피해 ‘스트롱맨’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러시아와 터키 등 강력한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대통령들과의 협력을 강화해 악화일로인 경제난에서 벗어나 보겠다는 취지지만 핵심 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쥐고 있어 이 같은 대외 행보가 ‘언 발에 오줌 누기’에 그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AFP통신은 6일(현지시간) 러시아를 방문 중인 마두로 대통령이 러시아에서 석유와 금광 산업에 대한 60억달러(6조7,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고 보도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이날 베네수엘라 국영 VTV를 통해 “우리는 석유 산업에 50억달러, 금광 산업에 10억달러 이상의 투자 보증을 각각 확보했다”며 “러시아의 투자는 하루에 약 100만 배럴 증산을 목표로 하는 베네수엘라 기업과의 합작 사업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고 밝혔다. 마두로 대통령은 트위터에 동영상을 올려 러시아가 밀을 제공하고 무기 유지보수를 지원하기로 한 사실도 전했다. 그는 “60만톤의 제빵용 밀 공급 계약에 서명했다”면서 “이는 올해 공급량을 웃도는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베네수엘라는 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 5월 마두로가 새 임기를 시작하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자 트럼프 행정부를 포함한 서방은 일제히 “불공정 선거”라고 비난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승리를 축하하는 전문을 보내 “양국 간 공조를 계속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우호 관계를 확인했다. 일각에서는 베네수엘라를 미국에 맞서는 남미 거점기지로 삼으려는 러시아와 푸틴의 지원을 통해 경제난을 타개해 보려는 마두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라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지난 3일에는 제2의 술탄이라 불리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베네수엘라를 국빈방문해 마두로 대통령과 협정 서명식을 하기도 했다.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을 보유한 베네수엘라는 2014년 이후 이어진 국제유가 하락세와 미국의 경제·금융 제재, 막대한 정부 지출, 무분별한 화폐 발행 등으로 초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이로 인해 쌀이나 항생제 같은 기본적인 식품과 의약품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내놓든 간에 별 소용이 없다. 베네수엘라 유수의 대학들이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국민의 87%가 빈곤 속에 살고 있으며 60%는 극심한 식량 부족으로 체중이 평균 11㎏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어린이 영양실조는 사상 최악 수준이며 지난 2014년 이후 230만명의 베네수엘라인이 새 삶을 찾아 고국을 등졌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10월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전망 보고서를 인용해 베네수엘라의 연간 물가상승률이 올 연말까지 137만%, 내년에는 1,000만%까지 치솟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내년 물가상승률 전망치로 제시된 ‘1,000만%’는 현대 경제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든 수준이다.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인 137만%는 IMF가 올 초 내놓은 전망치인 1만3,000%의 100배가 넘는 것이다. 또 IMF가 지난 7월 수정해서 발표한 물가상승률 전망치(100만%)보다도 더 높아진 것이다. AFP통신은 내년도 1,000만%라는 물가상승률 전망치에 대해 “지구 궤도를 벗어날 정도로 치솟는 수준”이라며 “독자들이 혹시나 잘못 본 건 아닌지 하고 0을 다시 세어봐야 할 정도로 상상할 수 없는 숫자”라고 놀라워했다.
마두로 정권은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이렇다 할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등 서방의 경제제재가 워낙 강력하기 때문이다. 지난 8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정부는 통화 볼리바르를 10만대 1로 액면 절하하는 개혁을 단행음에도 물가는 계속해서 치솟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많은 베네수엘라 식당이 메뉴에 가격 표시하기를 포기했으며 가게들 역시 물건에서 가격표를 떼버린 상태다. 치과부터 헬스클럽까지 아예 달러로 가격을 표시해둔 곳도 많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달 19일 트럼프 행정부가 베네수엘라를 테러지원국 명단에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지난달 1일 베네수엘라를 니카라과, 쿠바와 함께 ‘폭정 3인방’(troika of tyranny)이라고 지목하고 미국인들과 금 거래를 못 하도록 하는 제재를 가한 데 이은 후속조치로 해석되고 있다.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면 미국의 원조를 받는 것이 제한되고 금융 거래 등에서도 제재를 받게 된다. 특히 미국이 전 세계를 향해 해당 국가를 ‘불량국가’로 낙인 찍는 상징적인 효과가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의 민주주의 훼손, 인권탄압 등 독재를 비판하며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 경제제재를 가해왔다. 이런 가운데 베네수엘라가 테러지원국으로까지 지정되면 초인플레이션과 극심한 식량·생필품·의약품 부족 사태 등 가뜩이나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는 베네수엘라가 경제적으로 더욱 궁지에 몰릴 것으로 보인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9월 25일 마두로 대통령의 부인과 부통령 등 핵심 권력층 4명에 대해 부패 혐의로 금융제재를 단행한 바 있다.
마두로 대통령은 터키의 유명식당에서 고급 스테이크를 먹는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영국 가디언과 BBC방송 등에 따르면 지난 9월 중국을 방문한 마두로 대통령은 귀국길에 터키 이스탄불에서 스타 셰프인 누스레트 고크제가 운영하는 ‘누스르에트’ 식당을 찾았다. 마두로 대통령이 이곳에서 고급 시가를 피우고 스테이크를 먹는 장면은 고크제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동영상을 통해 공개됐다. 동영상에는 “이는 일생에 한 번 있는 순간”이라고 말하는 마두로 대통령의 육성과 함께 그가 자신의 이름을 새긴 명판이 붙은 상자에서 시가를 꺼내 피우는 모습 등이 담겨 있었다. 영국 가디언은 “마두로 대통령이 먹은 메인코스 요리는 250달러(약 28만원)로 이는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기준 8개월치 급여”라고 전했다.
/박홍용기자 prodig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