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거래’ 의혹에 ‘방탄 법원’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사법부가 이제는 ‘셀프 개혁’과 ‘단기 일자리 동원’ 논란까지 휩싸였다. 사법개혁을 완수하고 법원 독립 사수에 앞장서겠다고 수차례 강조하던 김명수 대법원장이 정작 이도 저도 아닌 행보로 궁지에 몰렸다는 분석이다.
◇예고된 ‘셀프 개혁’ 후폭풍=김 대법원장은 지난 12일 법원행정처를 통해 자체적으로 마련한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전달했다. 법원은 우선 그동안 문제 기관으로 지적됐던 법원행정처를 폐지하고 사법행정사무에 관한 심의·의결기구인 사법행정회의를 신설하기로 했다. 의장인 대법원장을 비롯해 법관 5명, 법원사무처장(비법관 정무직), 외부위원 4명 등 총 1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사법행정 집행기구로는 판사가 보직하지 않는 법원사무처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아울러 대법원장 자문기구에 머물렀던 전국법원장회의와 전국법관대표회의를 법률기구로 격상하기로 했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의 이 같은 안에 대해 벌써부터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사법행정회의를 심의·의결 기구가 아닌 사법행정 총괄기구로 둬야 한다는 ‘사법발전위원회 건의 실현을 위한 후속추진단’의 핵심 제안을 결국 거부했기 때문이다. 후속추진단은 대법원장 권한을 헌법과 재판상 권한으로 제한하고 사법행정과 관련한 모든 권한을 사법행정회의로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김 대법원장은 행정사무의 중심을 여전히 대법원장에 뒀다. 이는 사법행정회의가 비대한 권한을 갖는 데 대해 반발하는 법원 내 여론을 반영한 결정이었다. 지난 4~10일 법원행정처가 전국 판사들과 법원 공무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법행정제도 개선 설문조사’에 따르면 법관 79.0%를 비롯해 법원 직원 67.8%가 사법행정회의를 총괄기구가 아닌 심의·의결기구로 남겨야 한다고 답했다.
실제 지난 13일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서는 “김 대법원장의 개혁 의지가 후퇴했다”는 질타가 쏟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사법행정회의가 심의·의결 기구로 쪼그라진 데다 여기에 참여하는 법원 외부인도 10명 중 4명밖에 안 돼 사실상 제왕적 대법원장 권한은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법원 내에서는 정반대의 반발이 나타났다. 김 대법원장은 개혁안을 소개하면서 “임기 중 법원사무처 비법관화를 이루려는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지만 설문조사 결과 ‘신설될 법원사무처에 상근 법관을 두지 않는 것에 반대한다’고 답한 판사는 전체의 36.8%에 달했다. 판사들 가운데 ‘법관 보직인사의 기초업무를 법원사무처 비법관 직원이 담당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답한 비율도 48.5%에 이르렀다.
‘짬짜면식(式)’ 개혁안이 양쪽에서 압박받는 상황은 김 대법원장이 후속추진단과 법원 내부 의견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때부터 이미 예견됐다는 분석이다. 애초에 외부 인사 중심의 후속추진단에 개혁을 맡길 생각이었다면 과감히 수용했어야 했고,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당당히 법원 내부 목소리를 대변했어야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의 후폭풍은 김 대법원장 스스로 초래했다는 것이다.
◇정부 단기 일자리 창출 정책 동원 논란까지=이런 가운데 최근 사법부가 문재인 정부의 ‘단기 일자리 창출 정책’에 동원된 사실까지 확인되면서 김 대법원장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 논란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김명수 사법부마저 또다시 정권의 들러리로 전락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오신환 바른미래당 의원실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지난 10~11월 49개 사법기관을 통해 351명의 1~2개월짜리 단기 일자리를 채용했다는 내용의 자료를 이달 오 의원실에 제출했다. 급여는 월 176만9,750원이 지급됐으며 이들의 업무는 재판사무보조, 주차관리, 법원청사 청소, 민원안내 등 잡무에 집중됐다. 서울회생법원이 60명을 채용해 가장 많이 기여했으며 그 뒤를 대구지방법원(44명), 법원도서관(27명), 서울서부지방법원(22명) 등이 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현재도 해당 업무를 계속 이어가는 것으로 확인됐다.
법원은 지난 10월 기획재정부로부터 “단기일자리 예산이 필요한지 확인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같은 달 각급 법원에 e메일을 보내 인력 수요를 파악했다. 이에 서울회생법원 등 각급 법원은 ‘일용 임금’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과 필요 예산을 법원행정처에 제출했다. 채용 작업은 이 사업이 정부가 시행하는 ‘단기일자리 사업’과 관련 있다는 정식 공문도 발송하지 않은 채 이뤄졌다. 법원은 “추가인력 채용을 (각급 법원에) 권장한 사례가 과거에도 있었느냐”는 오 의원실 질문에 “없다”고 답했다.
한 법원 관계자는 “채용된 인력은 사실상 막노동 같은 일에 투입됐다고 보면 된다”며 “원래라면 기존 예산 안에서 법원이 자체적으로 근로자를 채용하지만 정부에서 예산을 더 준다니 당연히 호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를 두고 법조계 일부에서는 “청와대의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삼권분립 원칙이 무시됐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행정부 소속의 다른 공공기관과 달리 사법부는 원칙상 완전히 독립된 기구이기 때문에 정권 목표에 동원돼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 의원은 “대법원이 전례 없는 방식으로 행정부의 일자리 정책을 뒷받침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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