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지역구도의 역사는 힘의 균형보다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국가 간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한국이 속해 있는 동아시아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아시아대륙 군사·문화·경제·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세력들 간의 권력투쟁이 끊임없이 전개됐다. 이 권력 쟁탈전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수직적인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유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중국이었다. 1,000년간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한 중국은 주변국을 문명화한다는 명분 아래 조공과 책봉관계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소위 ‘팍스 시니카(Pax Sinica)’ 시대를 구가했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中華) 사상’으로 요약되는 팍스 시니카 시대는 군사력을 동원한 직접 지배보다 우월한 사상과 이념을 기반으로 한 문화 제국주의였다. 영원할 것 같았던 팍스 시니카 시대는 서구열강의 아시아 침탈이 본격화하면서 ‘아편전쟁(1839~1842년)’을 기점으로 저물어갔다.
조공과 책봉이라는 동북아의 국제질서를 대체한 것은 조약을 기반으로 한 미·러·일·영 등 서구열강의 다자체제였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패자가 사라진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세력다툼이 전개됐고 패권을 차지한 것은 서구열강으로부터 제국주의를 충실히 학습한 일본이었다. 1894년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문명에 대한 개방정책으로 국력을 키운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팍스 니포니카(Pax Nipponica)’ 시대를 열었다. 주도권을 잡은 일본은 서구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동아시아를 지키기 위해 한중일 등이 힘을 합치자는 연합국가 체제인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물적·인적 수탈을 하기 위한 명분으로 내세운 논리였을 뿐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의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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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망으로 다시 힘의 공백이 생긴 동아시아를 집어삼킨 것은 미소 냉전이었다.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간 이념전쟁은 동아시아를 휩쓸었고 이는 결국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현재 한미일의 해양세력과 북중러라는 대륙세력 간 첨예한 대립으로 상징되는 동아시아의 대결구도도 이때 고착화됐다. 1989년 냉전을 상징하던 베를린장벽이 붕괴되면서 소련이 중심이 된 사회주의 진영도 빠른 속도로 무너져내렸다.
강력한 두 축 중 한 축이 무너진 동아시아에는 미국 중심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시대가 도래했다. 동아시아에서 공고하던 미국의 패권은 중화제국의 영광을 복원하겠다는 중국의 급부상으로 위협받고 있다. 최근 발생한 미중 무역전쟁도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중국의 도전에 따른 결과물로 미국은 ‘인도·태평양’ 구상을 드러내며 동아시아의 패권을 지키기 위한 응전에 나섰다. 한반도의 경우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의 최전방 전진기지이고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으로 나아가는 교두보로 전략적 중요성이 큰 만큼 우리는 원치 않는 싸움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청일전쟁과 한국전쟁 등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강대국 간 패권경쟁 속에서 한반도가 강대국의 전쟁터가 됐던 과거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생존을 넘어 국익을 위한 전략 마련이 필요한 때다.
/박우인기자 wi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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