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불거진 ‘흑인 분장’(Blackface) 사진 논란이 미국 사회에서 가장 예민한 ‘인종차별’, ‘백인 우월주의’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버지니아주 주지사를 비롯한 일부 정계 인사들이 흑인 분장을 하고 찍은 과거의 사진으로 비난을 받은 데 이어, 마침 패션업체 구찌가 흑인 분장을 연상시키는 의류를 내놨다가 뭇매를 맞는 등 논란이 전방위적으로 확산하는 양상이다. 논란의 당사자들은 흑인 분장이 단순한 ‘오락’이었다면서 인종차별의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한때 유행하는 ‘패션’과 같다는 것이다.
이번 흑인 분장 논란의 근원지인 버지니아에서는 주지사와 검찰총장 모두 사퇴 압력에 직면한 상황이다. 시작은 이달 1일 랠프 노덤 버지니아 주지사가 졸업한 이스턴 버지니아 의대의 1984년 졸업앨범에서 한 사진이 공개되면서다. 그의 이름과 인물 사진이 나온 페이지에 KKK 복장을 한 사람과 흑인으로 분장한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파티 장면이 담긴 사진이었다. 곧이어 버지니아주 마크 허링 검찰총장은 1980년대에 흑인 분장을 하고 파티에 참석한 사진이, 버지니아주 상원의 토머스 노먼트 공화당 원내대표는 버지니아 군사학교 재학 시절 편집자로서 발간한 졸업앨범에 인종차별적인 사진이 실렸다는 사실이 공개돼 논란에 휩싸였다.
패션업체 구찌도 최근 얼굴의 절반을 덮는 터틀넥 스웨터 신제품을 선보였다가 흑인 분장 논란에 휘말렸다. 이에 구찌는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해당 제품 판매를 중단했다. 프라다도 마찬가지로 지난해 말 비슷한 파동을 겪은 바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7일(현지시간) 흑인 분장의 역사와 문제점을 조명한 기사에서 “흑인 분장은 문제 있는 문화유산의 일부”라며 “180년 이상 (흑인에 대한)인종차별적인 고정관념이 오락에 활용됐다”고 흑인 분장의 역사성을 지적했다. 미국에서 흑인 분장은 1832년 토마스 다트머스 라이스가 뉴욕의 극장에서 악극 ‘점프 짐 크로우(Jump Jim Crow)’를 공연할 때부터 미국 대중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라 린 반스 프린스턴대 미국 문화사 교수는 NYT와 인터뷰에서 “민스트럴 쇼 등 백인 배우가 흑인분장을 한 공연은 남부에서 행복하고 멍청한 흑인 노예의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대중화시켰다”고 짚었다.
당시 백인 연기자들은 태운 코르크나 구두약으로 얼굴을 검게 칠한 채 무대에 올라 공연을 했다. 1986년 영화 ‘소울 맨’은 토머스 하웰이 흑인으로 변장해 하버드 법대의 장학금을 받아 소동을 겪는 내용이었으며, 2000년대 초반 ‘더 맨 쇼’라는 프로그램은 배우 지미 키멜이 흑인 농구선수 칼 말론처럼 변장한다며 흑인 분장을 한 바 있다.
1905년 출간된 소설 ‘더 클랜스맨’은 흑인들이 백인 여성들이 겁탈하고, KKK(큐 클럭스 클랜·백인 우월주의 결사단)가 백인들을 구하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영화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으로도 만들어졌다. 영화에서도 백인 배우들이 얼굴을 검게 칠하고 흑인으로 변장했다. 이 영화는 당시 백악관에서 상영됐는데 윌슨 대통령은 영화 내용을 두고 “유감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 모두 너무나도 사실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NYT는 소개했다. 1852년 출간된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은 노예제에 반대하는 내용이었음에도 1853년 뉴욕에서 뮤지컬로 처음 상연할 때 모든 배우가 백인이었다. 흑인 분장이 오락으로서 일상화되자 심지어 흑인 연기자들조차 그러한 관념이 반영된 흑인 이미지를 연기하기도 했다.
미국 대중문화에서 흑인 분장은 계속해서 활용돼왔다. 최근엔 여성들이 흑인처럼 보이게 화장하는 ’블랙피싱‘(blackfishing)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정치인과 연예인 등 저명인사들이 흑인 분장으로 역풍을 맞은 사례도 있다. CNN에 따르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의회 의원 후보인 브랜트 톰린소는 핼러윈 파티에서 자메이카 봅슬레이선수처럼 분장했고,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후보 할 패튼은 흑인 축구선수처럼 분장한 적이 있다. 스페인 축구선수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는 흑인으로 분장한 두 명과 사진을 찍고 이를 트위터에 올렸다가 비판을 받았으며, 프랑스 축구선수 앙투안 그리즈만은 1980년대 테마 파티에서 흑인 분장을 했다가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박원희 인턴기자 whatamov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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