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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배우 이순재] "연기를 예술로 승화, 이 신념 하나로 60여년 직진해왔죠"





배우 이순재(사진)는 올해 85세로 현역 배우 중 최고령이다. 게다가 원로 배우로서 간간이 출연하는 게 아니라 드라마·예능프로그램·영화·연극은 물론이고 CF까지도 종횡무진 출연한다. ‘초 단위 스케줄’을 소화하는 아이돌 못지않게 왕성하게 활동하는 ‘진짜 현역’이다. 서울대 철학과 재학 시절부터 연극을 했던 그는 지난 1956년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가’로 데뷔했다. 연극에서 드라마 등으로 장르를 옮겨가며 활동을 넓힌 그의 발자취는 ‘한국 배우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가 보여준 연기는 또 어떤가. 우리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이었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나침반과도 같았다.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열연 중이며 드라마 ‘리갈하이’에서 존재감 있는 연기를 선보이는 그를 최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인터뷰 예정시간보다 먼저 도착해 있는 그에게 다가가면서 기자는 드라마를 통해 보던 ‘회장님’의 카리스마와 지적인 ‘꽃할배’, 친근한 ‘야동 순재’ 등 여러 가지 모습이 한 번에 겹쳐 보이면서 한국의 최고 배우가 만들어내는 오라가 느껴졌다.

‘영원한 현역 배우’일 것 같은 그에게 가장 궁금했던 건 왕성한 활동의 비결이었는데 역시 그 나름의 비결이 있었다. “그저 기력이 버티고 있으니까 한다. 아직 쓰러진 적이 없고 어머니가 96세에 돌아가셨는데, 넘어지지만 않으셨더라면 백수를 누리셨을 만큼 건강하셨는데 나도 타고난 것 같다. 초등학교 이전에 말라리아 등 병에 다 걸려 봐서 면역체계가 생긴 것도 같다. 초등학교 때 대운동회를 소화해본 적이 없다. 소운동회·예비운동회까지는 했는데 막상 대운동회를 하면 배탈이 난다거나 했다. 또 철저한 관리도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젊은 시절부터 술을 하지 않았고 담배도 1980년대 끊었다.”

예술가로서 인정받을 것이란 목표로 대학 때 연극으로 배우의 길 들어서

연기는 창조적 예술로 혼 담겨 있어야...AI 시대에도 끝까지 살아남을 직업

서울대 철학과 출신인 그는 대학교 때부터 연극을 했고 그 경험들이 그에게 배우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딴따라’라고 해서 배우나 가수 등 연예인에 대한 평가가 높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연기도 열심히만 한다면 예술의 행위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몸소 연극을 하고, 명작 영화를 접하면서 가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서양의 경우는 배우의 역사가 길다. 기원전부터 있었고 그리스나 로마 모두 기원전에 무대가 있었다. 야외극장에서 (연기와 같은) 유사한 행위가 있었고 프랑스·영국 등에서는 당대 최고의 배우를 위해 헌정하는 작품들도 많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배우의 역사가 일제 강점기 정도부터로 짧고 예술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기껏 잘 봐줘야 모방예술가라고 해줬다. 그러나 배우란 자신의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작품 속에 글로 쓰인 인물을 살려내 보여주는 창조 행위다. 생명력을 넣고 창조하는 행위다. 그동안 수많은 햄릿이 무대 위를 지나갔지만 그 어느 햄릿도 같은 게 없을 것이다. 바로 배우의 창조력 때문이다.”



인공지능(AI) 등으로 인해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어도 배우만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그는 장담했다. “컴퓨터그래픽(CG)으로 기본적인 표정은 나오는 것 같다. 그러나 로봇을 의인화해서 어느 정도는 연기할 수 있겠지만 혼이 없다. 연기에는 혼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가슴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쇳덩어리가 온기와 훈기, 그리고 정서를 표현할 수 없다. 임마누엘 칸트 독일 철학자는 “우주의 불가사의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저 우주 공간이고 하나는 내 가슴의 심성”이라고 했다. 인간의 심성은 정말 불가사의하고 무한하다. 이걸 어떻게 로봇이 표현하겠는가.”

탄탄한 직장에 들어가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오직 연기 하나만을 바라보며 ‘직진’했던 그 시절은 월급 혹은 출연료라는 개념조차 없을 정도로 연극계의 상황이 열악했다. “대학 때 연극 연기를 시작해서 한 12년은 돈을 못 벌었다. 연기를 해서 처음 돈을 받은 게 1978년 ‘세일즈맨의 죽음’으로다. 이 작품이 대박이 났다. 재공연을 현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했다. 당시 봉투를 하나 주는데 얼마인지 보지도 않고 집에 가져다줬다. 얼마 안 됐을 거다(웃음). 그 후에 현대극장에서 ‘빠담빠담빠담’을 했을 때도 히트가 돼서 아마 조금 받았을 것이다.”

이씨가 활동하던 1960년대는 무대 공연은 지금보다 더 열악했고 방송사는 사정이 훨씬 나았다. 그는 무대에서 방송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텔레비전으로 넘어온 건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배우 외에는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남하고 다투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악착같이 뭐 이런 게 없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건 1974년 TBC에 전속으로 들어가면서부터다. 초반에는 월급을 받았는데 한 달에 31편을 했다. 그다음부터는 출연료를 받았는데 그걸로는 안 되니까 드라마도 한두 개 더 했다. 죽은 이낙훈 등 동료들이 이렇게 해서 다들 텔레비전으로 넘어온 것이다. 연극을 해서 시간 잘 지켜, 대본 다 외워와, 적당히 그냥 얼굴만 믿고 올라온 아이들과는 다른 거지. 이렇게 수입이 늘어나면서 10년 후에나 겨우 25평짜리 집 하나 만들었다. 어휴 이것도, 안에서 살림을 절제해줘서 가능했던 일이다. 당시 여편네들이 참 고생을 많이 했다고. 지금이면 다 도망가지(웃음).”

현재 한국 최고의 배우이자 최고로 바쁜 배우기도 한 그이지만 전성기는 비교적 늦게 찾아왔다. 1991년 ‘사랑이 뭐길래’에서 대발이 아빠 역을 맡으면서 ‘국민 아빠’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것이다. 당시 가부장적이면서도 가족에 대한 사랑을 투박하게 표현하는 한국의 전형적인 아버지로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연기한 것이 대중의 환호를 받았다. 이후 ‘동의보감’ 등에 출연해서는 시대가 바라는 스승이자 멘토인 유의태 역할로 뭉클한 감동을 선사했고 ‘돈꽃’에서는 재벌 회장을 맡아 돈과 권력의 속성을 섬뜩한 연기로 표현해 화제가 됐다. “젊은 시절 눈에 번뜩이는 외모도 아니고 키도 작아서 영화, 드라마 등에서 지금처럼 주목받지는 못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TBC 드라마 ‘연화’에서 악역으로 출연했는데 드라마가 정말 폭발적으로 인기가 많았다. 무대가 됐던 회암사가 불교 신자들의 성지가 됐을 정도다. 그래서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 참여하는 법회가 크게 열렸는데 출연배우들에게 표창장을 줬다. 그런데 나는 명단에 없었다. 악역 때문에 드라마가 인기가 많았는데도. 상을 받지는 못하지만 그 자리에 갔는데 어떤 할머니가 일어서더니 “이순재씨 때문에 우리 불교가 집중을 받았는데, 왜 악역이라고 상을 안 주느냐”고 소리를 치더라. 그 일이 있고 나서 표창장이 왔다(웃음).”





대발이 아버지·꽃할배·야동 순재를 대중들은 많이 좋아하고 기억하지만

‘풍운’의 대원군이 내 최고의 명장면...4분 정견 발표 찍으려고 담배도 끊어

수많은 작품에 출연한 그에게 명장면을 꼽아 달라고 주문하자 껄껄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하나둘이 아니다. ‘풍운(1982년)’이다. 흥선대원군 역할을 맡았는데 대원군이 올라선 후 백관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정견을 발표하는 4분가량의 분량이다. 당시 대원군은 인물의 스케일 때문인지 체격이 큰 배우가 했다. 신영균 선생님, 최불암, 전운 등. 그런데 실제 대원군은 오척단구에 다섯 치밖에 안 되는 대추씨 같이 바짝 마른 사람이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엄청난 에너지를 그 장면에서 표현한 것이다. NG를 내면 안 되는 장면이다. 이걸 하려고 담배도 끊은 거다.”

요즘은 개성 있는 외모가 대중에게 매력 포인트지만 수려한 얼굴과 체격 등 외모가 중요했던 과거에 배우 이순재가 살아남았던 것은 바로 이런 철저한 프로정신과 연기를 예술로 승화시키겠다는 목표와 의지 때문이었다. 그는 ‘풍운’ 속 한 장면이 명장면이라고 하지만 대중에게는 아마도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 순재’가 아닐까. “처음에는 그 장면을 나도 껄끄럽게 생각했다. 점잖은 사람이 그런 걸 한다는 게. 이건 배역을 생각한 게 아니라 나를 생각한 거다. 왜냐면 그걸 하면 고등학교·대학교 동창놈들이 “별짓을 다 한다. 욕 좀 할 텐데”라고 걱정을 했다. 피디에게 안 하는 방법이 없느냐고 하니 꼭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거 보는 것을 들킨 것만큼 난처한 게 없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볼 때는 참 재미있는 시추에이션이다. 의외로 반응도 좋더라. 욕하는 사람도 없고. 애들이 좋아하더라. ‘저희의 관심사를 할아버지도 똑같이 갖고 있구나. 동격이구나’ 이렇게 생각한 것 같다.”

햄버거 광고까지 왕성한 활동, 기력이 버텨주는 게 비결

최선 다하고 박수 받을 때 가장 행복

‘대발이 아버지’에서 ‘야동 보는 할아버지’로, 햄버거를 한입 가득 넣어 먹는 광고(맘스터치)로 햄버거 광고계에 시니어 모델 바람을 일으키는 등 달라진 시대에 발맞춰 어른의 이미지를 선보여온 이씨는 폴리테이너·소셜테이너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민자당)으로 당선돼 정치 활동을 한 그는 가장 어려운 게 사람의 마음과 표를 얻는 것이라고 했다. “국회의원이나 배우나 둘 다 대중을 상대하는 직종이다. 정치인은 표를 받아야 하고 우리는 박수를 받아야 하는 게 다른 것이다. 정치인은 표를 얻는 데 상당히 힘이 든다. 진짜 머슴이 돼야 한다. 나를 버려야 한다. 행복의 조건은 없는 것 같다. 정치인이 행복한 것은 공약이 이뤄져서 유권자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다. 그 전에 고통스러운 조건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런데 연기는 다르다. 열심히 하고 박수받고 그러면 행복하다. 내게는 그런 것이 충분한 행복의 조건이 된다.”
/연승기자 yeonvic@sedaily.com 사진제공=김리안작가

He is

△1935년 함경북도 회령 △1953년 서울고 졸업 △1956년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가’ 데뷔 △1958년 서울대 철학과 졸업 △1971년 제1대 연기자협회 회장 △1977년 제1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남자 최우수연기상 △1992년 14대 민자당 국회의원 △1993년 민자당 부대변인 △1998년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석좌교수, 대한적십자 친선대사 △2002 문화관광부 문화의 날 보관문화훈장 △2009년 제6회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정 △2010년 국민연금공단 홍보대사 △2010년 서울대 강사, 민선5기 서울시 홍보대사 △2010년 제2회 대한민국 서울문화예술대상 심사위원회 위원장 △2011년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 SG아카데미 원장 △2013년~ EK티쳐 원장 △2015년~ 제3기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촉위원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 은관문화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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