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초대 이승만 정권 시절 여당의 전당대회는 대통령의 뜻을 그대로 받들어 실행하는 거수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난 뒤 치러진 전당대회에서는 참석 대의원들이 어김없이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찾아 이 대통령에게 예의를 표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심지어 이 대통령은 거동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자유당 대선후보로 추대되는 자리에도 참석하지 않을 만큼 당 장악력을 과시했다. 그러다 1956년 발생한 민주당 전당대회의 장면 부통령 피격사건은 당시 야당 정치인에 대한 정부 여당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장면 부통령 취임 한 달여 만에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장 부통령은 연설을 마치고 나가다 괴한이 쏜 총에 맞았지만 간신히 목숨은 건졌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뒤늦게 밝혀진 사건의 배후에는 내무부 치안국과 자유당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이승만 정권의 오점 중 하나로 기록됐다.
박정희 군부가 집권한 1960~1970년대 들어서는 여당 전당대회가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민주공화당은 1966년 임시전당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위한 개헌 결의안을 통과시킨 뒤 1970년대 들어서는 10년 가까이 전당대회를 열지 않았다. 반면 야당 전당대회에서는 현대 정치사의 획을 긋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졌다.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는 한국 정치의 양대산맥이 된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처음으로 맞붙었다. 유진산 총재의 지원으로 YS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됐지만 ‘40대 기수론’으로 돌풍을 일으킨 DJ가 결선투표 끝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당시의 대결은 지금도 현대 정치사의 명승부로 꼽힌다. 1976년 신민당 새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대에서는 조직폭력배가 동원된 희대의 폭력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범서방파 두목으로 잘 알려진 김태촌 일당은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의 사주를 받고 전대가 열리던 서울시민회관에 난입해 각목을 휘두르며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정권과 조폭이 결탁한 전당대회 폭력사태는 1987년 일명 ‘용팔이 사건’으로 유명한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으로 되풀이됐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당대회는 형식적이나마 점차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1990년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간 3당 합당으로 태어난 민주자유당은 100일 넘게 이어진 논란 끝에 첫 전당대회를 열고 체제정비를 마쳤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92년 민자당 전대에서 김영삼 최고위원이 대선후보로 선출되고 그해 치러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1997년 신한국당 전대에서는 이회창·박찬종·이인제·이한동·최병렬 등 거물급 정치인이 대거 맞붙어 결국 이회창 대표가 대선후보로 선출됐지만 대선에서 낙마했다.
2002년 ‘노무현 돌풍’을 가능케 한 새천년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 도입은 전당대회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획기적인 사건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기존 당원 중심의 폐쇄적 결정구조에서 일반 국민 여론조사까지 포함한 개방적 구조로 탈바꿈함으로써 전대 흥행몰이에 큰 공을 세웠다. 경쟁 당 지지자들이 참여하는 역선택 논란도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정당이 국민참여경선을 채택하고 있다. 여기에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대중화가 큰 몫을 했다. 국회 최장수 보좌진 경력의 김현목 보좌관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 어르신에게 막걸리 대접하면서 서울 구경을 시켜준다고 꾀어 입당시킨 뒤 전당대회에 동원하던 구태가 남아있었다”며 “이제는 국민 의식 수준이 높아진데다 온라인을 통한 자발적 당원 가입도 늘면서 전당대회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최근 자유한국당 전대 과정에서 불거진 일부 후보들의 극우 망언 논란은 퇴행 우려를 자아낸다. 한 여당 관계자는 “일부 정치인의 막말을 보면 손에 각목만 안 들었을 뿐 1980년대 용팔이 사건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며 “정당문화의 퇴행이자 정치불신을 가중시킬 수 있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김현상기자 kim012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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