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 3일부터 중국의 연중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兩會)’가 베이징에서 열린다. 3월 한달 동안 전국인민대표대회(약칭 전인대)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약칭 정협) 등 2개 행사가 함께 열리는데 이를 통칭해 양회라고 부른다. 전인대와 정협은 1년에 딱 한번 봄에 전체가 모인다. 그래서 연중 최대 행사가 된다. 전인대는 우리로 하면 국회에 해당된다. 반면 정협은 중국만의 독특한 시스템이다. 이런 복잡한 정치과정이 필요한 데는 곤란했던 중국의 역사가 숨어 있다.
물론 중국에도 제대로 된 의회제도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인 1913년의 일이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라는 공화제를 선택한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의회를 꾸리기 위한 선거를 한다. 1912년 12월과 1913년 1월 2단계 선거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정식 ‘국회’를 구성했다. 양원으로 이뤄졌는데 정원은 하원 격인 중의원 의원이 596명, 상원인 참의원은 274명이었다.
시대적 상황에 맞게 보통선거는 아니고 제한선거였다. 우리나라도 보통선거가 1948년에 처음 실시 됐으니 앞서 수십년 전 중국의 제한선거를 탓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당시는 제정에서 벗어나 공화정을 처음 받아들였고 의회는 대부분에게 익숙한 제도는 아니었다. 중국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1912년 선거권을 가진 사람은 선거구에 2년 이상 거주하고 직접세를 ‘2원’ 이상 납부하거나 ‘500원’ 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소학년 졸업이상의 학력이 있는 21세 이상의 남성이었다고 한다. 이런 자격을 만족하는 사람은 당시 중국 인구의 10% 정도였다 . 선거과정은 더 논란이 됐다. 아직 선거가 뭔지, 의회라는 대표기구가 왜 필요한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온갖 불법이 난무했다. 국회의원이 되는 데 수백만원이 드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고 한다. 광활한 영토에서의 동시선거의 어려움, 근대문명에 대한 무지, 귀족계급의 폭주 등으로 중국의 의회제는 시작부터 토대가 흔들렸다.
어쨌든 이 선거에서 과반을 장악한 것은 국민당이다. 국민당의 지도자 쑹자오런이 의회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하지만 당시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으로 황제의 꿈을 꾸고 있던 위안스카이는 국회의 간섭이 불만이었다. 곧바로 쑹자오런을 암살하고 국회를 해산한다. 이후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가 퇴위하고 곧 사망한다.
그나마 힘으로 중국을 묶고 있던 위안스카이라는 벽이 1916년 무너지면서 중국은 사분오열, 즉 군벌내전에 휘말린다. 국회는 중국 안을 떠돌며 명맥을 유지했지만 군벌정권의 거수기에 불과했고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각 지역에 할거하던 군벌을 꺾고 중국을 재통일한 것이 바로 장제스의 국민당이다. 하지만 이미 중국에서 의회제도는 신뢰를 잃었다. 국민당도 이후 대만으로 쫓겨갈 때까지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했다.
의회도 없이 정치는 어떻게 이뤄졌을까. 국민당이나 공산당, 기타 제3세력 등 혁명가들이 이끄는 집단들이 충돌했다. 국민당은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비난을 받았다. 무력으로 반대세력을 눌렀지만 이에 반발하는 제3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장제스가 결국 중국에서 실패한 이유다.
반면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던 공산당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제3세력들은 공산당을 적극적, 또는 암묵적으로 지지했다. 당시에 민주제당파(民主諸黨派)라고 불린 그들이다. 보통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중국민주동맹, 중국민주건국회, 중국민주촉진회, 중국농공민주당, 중국치공당, 대만민주동맹, 구삼학사 등 8개 정당이다. 공산당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이들 민주제당파는 중요한 작용을 했다. 민주제당파는 군사적으로는 별볼일 없었지만 이들은 지지는 중국인들의 ‘민심’이 공산당을 지지했다고 해석됐다. 공산당식으로 이야기하면 ‘통일전선전술’이 통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앞두고 공산당과 민주제당파들이 모여서 회의를 연 것이 바로 ‘정협’의 시작이다. 정협은 1949년 9월21일 베이징에서 1차회의를 연다. 여기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조직법’ 등 조직대강이 만들어졌다. 실제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 선포는 열흘 뒤인 10월1일이다. 그 이후 70년 동안 공산당이 민주제당파의 협조 아래 중국을 통치하고 한다는 골격이 완성됐다. 물론 민주제당파는 이후 마오쩌둥이 권력을 강화하면서 힘을 잃고 형해화된다.
한국이나 서구 국가들의 국회와 같은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린 것은 1954년이다. 형식상으로 이 전인대에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이 통과됐다. 이후 1959년 전인대와 정협이 같은 시기에 개최되며 ‘양회’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1985년부터는 양회가 현재처럼 3월에 개최되는 것이 관례가 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여유로 현재까지 정협과 전인대가 동거하는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대표성도 다르다. 정협은 기존 민주제당파 외에 현재는 총공회·부녀회 등 사회조직, 문화계·경제계 직업조직 등이 참가하는 데 쉽게 말하면 직능대표들의 자문기구에 가깝다. 유명 기업가나 연예인들도 주로 정협 위원이다. 반면 전인대는 다른 나라의 국회처럼 지역 대표로 구성된 의결기구다. 구성원은 정협이 ‘위원’으로, 전인대는 ‘대표’로 호칭한다.
물론 당연히 전인대 대표나 정협 위원 모두 공산당원이거나 공산당에서 승인한 인물들이다. 선출의 위한 기본 자격은 능력과 전문성 외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한다. 국가는 즉 당국가 체제를 말한다. 충성심이 능력보다 더 중요하다고 한다. 때문에 대놓고 공산당 정책에 반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당연히 양회는 지방정부에서도 같은 구조의 조직을 갖고 있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은 공산당과 민주제당파가 합친 “연합정부”(마오쩌둥의 말)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정협은 특별대우를 받는다. 올해 양회는 3월3일에 열린다. 세부적으로 정협이 3월3일 시작되고 전인대는 이틀 뒤인 5일 개막한다. 정협이 먼저 열리는 것은 전인대에 보고할 각종 자료를 먼저 정협에서 검토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물론 모든 결론은 의결기구인 전인대에서 나오지만 정협은 존재 자체로 중요하게 취급된다.
전인대와 정협의 회기, 즉 대표들의 임기는 5년이다. 이는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 임기 5년과 같다. 양회는 매년 개최되는 데 반해 공산당 당대회는 5년에 한번 열린다. 당국가 체제에 따라 공산당이 10월에 당대회를 진행해서 정책방향이나 대표를 뽑고 나면 그 다음해 3월에 전인대가 새로 시작되면서 이를 추인하는 절차를 밟는다. 따라 5년 임기 첫해의 양회가 중요하다.
현 전인대는 지난 2018년 임기를 시작했으니 올해는 2차 회의를 갖는 셈이다. 공산당은 5년 단위로 당대회를 하니 임기 첫 해를 빼고 4년간은 공산당 당대회 없이 양회만 진행된다. 일반적으로 양회가 중국 최대의 정치행사라고 하는 이유다. 즉 5년 중에 1년은 공산당 당대회가 최대 정치행사다.
매년 양회에는 세계인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양회에서 발표되는 ‘숫자’ 때문이다. 지난해 양회에서는 나름대로 정부 인사 등 굵직한 발표들이 많았다. 헌법 수정을 통해 국가주석 연임제한을 철폐하고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한 것도 지난해 전인대에서다. 상대적으로 2년차부터는 역할이 적다. 내외신 들은 올해 양회가 경제문제에 집중할 것으로 보고 있다. 양회의 하이라이트는 5일 전인대 개막날에 공개되는 ‘정부공작(업무)보고’다. 보통 국무원 총리(현재 리커창)이 발표한다. 그 해의 거시경제 운용방안을 결정하고 예산안을 확정한다.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경제성장률 목표치가 이날 5일 나온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경제성장률 전망치에 관심이 집중된다. 앞서 지방양회를 통해 주요 도시들은 올해 성장률을 줄줄이 낮추며 올해 경기둔화를 기정사실화 했다. 중국내 매체에 따르면 베이징과 광저우는 올해 성장률 목표치를 6.0~6.5%의 구간으로 설정했다. 이는 지난해 목표치인 베이징 7.5%, 광저우 6.5%보다 낮아진 수치다. 선전 역시 성장률 목표치를 ‘7% 내외’로 제시해 지난해 ‘8% 이상’보다 낮췄다.
지난해 전인대는 그 해 경제성장 목표치를 ‘6.5% 안팎’으로 제시했고 실제 경제는 6.6% 성장했다. 올해 전인대는 6%대 초반의 목표치를 제시할 가능성이 크다. 그나마 현재 진행중인 미중 무역전쟁이 중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결된다는 전망에서 가능한 수치라고 할 수 있다.
지역과 직능을 대표하며 정교하게 짜여진 것 같지만 실제 정협이나 전인대 모두 공산당의 결정을 승인하는 고무도장, 거수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공산당이 주도하는 중국 정부는 전년 말이나 당해 초에 각종 정책을 확정해 양회로 넘긴다. 양회, 최종적으로는 전인대가 국가의 최고의결기구이기 때문이다.
현재 양회 제도와 시스템 자체에 대한 반대는 중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반대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 같은 거대한 나라에서 한국이나 서구식의 의회선거는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자포자기도 있다. ‘1913년 국회’의 실패가 100년 이상 악영향을 미친다고 할까. 해외에서도 제도 자체를 폄하 하는 목소리는 별로 없다. 중동의 왕정, 북한 같은 1인지배 국가가 있는 상황에서 중국 제도를 마냥 비난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지난해 전인대는 헌법을 개정해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조항을 폐기해 시 주석의 장기집권 길을 열었다. 당시 표결에서는 총 2,964표 가운데 찬성이 2,958표였다. 이중 반대는 0.0007%인 2표에 머물렀다. 이외에 기권 3표, 무효 1표였다. 흥미 있는 것은 반대 2표는 중국의 지금 현실에서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일 텐데 당시 정부나 어느 매체도 누가 그랬는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혹자는 반대가 아예 없을 것은 걱정한 중국 당국의 ‘짜맞추기’라는 해석도 나왔다. 당시 개헌에 대해서는 “마오쩌둥의 종신집권은 개인독재로 흘렀고, 중국을 암흑시대로 몰아넣었다”는 작가 라오구이의 공개성명이나 웨이보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비판이 있었지만 곧 방송과 신문 등 관변매체의 압도적인 찬성 목소리에 휩쓸렸었다.
참고로 용어를 정리한다면 중국은 공산당의 당대회를 전국대표대회라고 부르고 우리의 국회 같은 국가 단위는 여기에 ‘인민’을 붙여 전국인민대표대회라고 한다. 일개 당 행사에 전국대표대회라고 한 것은 쑨원이 국민당을 개조하면서 시작됐다. 쑨원은 자신들이 중국을 대표한다면서 국민당이 그냥 ‘전국대표대회’를 연다고 했고 이후 공산당도 그대로 따랐다.
/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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