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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이 풀어내는 한민족의 기원]항일운동·강제이주...恨서린 땅엔 기념비만 덩그러니

<4> 한민족 역사무대 '러시아 연해주'를 찾아서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연해주 우수리스크 시 외곽 스위픈강가에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가 서 있다.




러시아의 한인 강제이주라는 쓰라린 아픔의 역사가 서려 있는 라즈돌로예역 앞에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서 있다. 지나는 이 하나 없는 역사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에서는 당시 한인들의 애환은 찾을 길이 없다.


연해주 크라스키노 부근 ‘연추마을’에 있는 ‘단지동맹비’앞에서 김석동(왼쪽 두번째) 전 금융위원장과 동행자들이 태극기와 자국 국기를 펼치고 있다. 단지동맹비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애국지사들이 무명지를 끊으며 조국광복을 맹세한 것을 기려 지난 2011년 세워진 기념비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연해주는 지금은 러시아 땅이지만 고대·중세·근세에 걸쳐 한민족 역사와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를 가진 땅이다.

러시아는 8개 연방지구로 나뉘는데 이 중 동부지역에 러시아의 36.4%를 차지하는 ‘극동지구’가 있고 그 동남쪽 끝에 있는 주가 ‘연해주’ 다. 16만4,700㎢의 면적(우리나라 약 1.6배)에 약 200만명이 살고 있다. 연해주는 북방 기마민족이 세운 금(金)·원(元)·청(淸)이 차례로 지배했으나 러시아가 17세기에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해 청나라와 분쟁을 벌였고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 영토가 된다.



발해의 혼 깃든 땅

고조선·발해까지 한민족 세력권

동경 용원부 크라스키노 성터 등

알려진 발해 유적지만 280곳 달해

한민족 이주와 독립운동

1863년 함경도 지역 농민 13가구가 연해주로 이주한 이래 러시아와의 우호적 분위기에서 한인 이주가 계속 늘었고 특히 일제강점기에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대거 이주했다. 이들은 지신허·연추 등에 한인 마을을 형성해 살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이 세워졌다. 연해주는 두만강으로 한반도와 접하고 있는데 겨울에는 강이 얼어 이동이 쉽고 남부지역은 지형·토질뿐 아니라 나무와 야생화 등 식생이 우리나라 중남부 지역과 대단히 흡사해 이주를 가속화했다.

1910년을 전후해서는 애국지사의 망명과 이주가 줄을 이어 연해주는 만주의 북간도와 함께 조직적인 항일운동의 거점이 됐다. 1908년 최재형·이범윤·안중근·이위종 등은 연추에서 ‘동의회’를 결성했다. 이범진·이준·이상설·이위종은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인공들이다. 이범진 초대 러시아 공사는 헤이그 밀사를 발 벗고 후원했고 나라를 잃은 뒤에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은 후 조국의 절망적 상황에 저항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이어 의병부대 ‘13도 의군’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권업회’가 창설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광복군정부’가 수립됐다. 1919년 연해주에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회의’가 세워졌고 그해 상하이임시정부와 통합됐다. 3·1운동을 계기로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이 요원의 불길같이 확산하자 이를 크게 겁낸 일제는 1920년 봄 연해주 한인 학살에 나서 살인과 방화를 자행했다. 하지만 연해주의 한인들은 일제에 대항해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연해주의 고려인



연해주는 또 다른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의 스탈린은 연해주에 살던 전체 한인들을 강제이주시켰다. 이유는 어이없게도 일본과 내통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총 17만1,781명이 무작정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향했다. 굶주림과 공포 속에 열차가 도착한 곳은 6,000㎞ 떨어진 반사막 지대인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인근 지역이었다. 이들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던지, 처음 2년간 1만2,00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한인들의 생명력은 강인했다. 척박한 땅에 버려진 이들은 결국 소비에트 최고의 모범 집단을 일궈내면서 살아남았다. 소련 해체 후인 1993년 러시아는 고려인 명예회복 법안을 채택했고 고려인이 연해주로 가는 길은 다시 열렸다. 현재 연해주에 거주하는 고려인 5만여 명 중 3만여 명은 재이주해 정착한 사람들이다.

한민족 고대·중세 역사

연해주는 한반도와 인접한 지역으로 고대로부터 한민족 역사의 무대였다. 극동연방대학 박물관에는 BC 1만5000년 전 구석기 유물이 있다. 이후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이곳은 고조선의 역사 무대였고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다. 고구려는 668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나 698년 발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연해주는 발해의 국토이자 주요 거점 지역이었다.

연해주에서는 지금도 발해 유적지가 계속 발굴되고 있다. 알려진 발해유적지가 280곳에 달한다. 발해 5경 중 하나인 동경 용원부 지역에 속했던 크라스키노에서 발굴된 발해 성터는 발해 역사 규명에 있어 기념비적인 발굴로 평가되고 있다. 크라스키노는 일본으로 가는 해로의 출발점인 항구로 당시 활발한 발해 해상활동의 전진기지다.

잊혀진 항일운동 본산

최초 임시정부 대한국민회의 설립

초기 독립운동 중심축 ‘신한촌’

1937년 강제이주로 폐허만 남아

연해주 역사탐방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정복’의 뜻을 가진 연해주 주도(州都)로 62만명이 살고 있는 러시아 극동의 부동항이자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있는 도시이다. 시내에서 신한촌 기념비를 방문했다. 원래 시내 중심지에 ‘개척리’라는 한인 집단 거주지가 있었는데 러시아 당국은 콜레라를 명분으로 강제 철거해 그 땅을 군용으로 전환하고 한인들은 1911년부터 피땀 흘려 다시 시외곽에 ‘신한촌’을 건설했다. 신한촌은 망명 항일애국지사들이 ‘권업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의 중심축이 됐다. 이곳은 1937년 한인 강제이주 때 폐쇄됐고 기념비만 남아 있다.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12㎞ 떨어진 곳에 있다. 가는 도중에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작은 역 ‘라즈돌로예’에 잠시 들렀다. 1937년 한인 강제이주 역사의 현장이자 ‘회한의 역’이다. 오가는 이도 보이지 않는 한적한 역 건물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 말없이 서 있었다. 역사 내부까지 살펴봤으나 쓰라린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우수리스크는 연해주 한인의 본거지이며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시내에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당하기 전까지 살았던 자택을 방문했다. 담벼락에 한·러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선생을 기념하는 현판이 달렸다. 고려인 문화센터에도 들러 고려인들의 애환의 역사를 실감하게하는 자료들을 둘러봤다.

시 외곽에 스위픈강이 있는데 강변에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곳 스위픈 강물에 뿌리다”라고 쓴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를 보며 다시 한 번 독립운동을 했던 주인공을 생각하며 머리를 숙였다.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이동해 발해 성터를 찾았다. 우수리스크는 옛 발해의 솔빈부로 추정되고 있는 지역으로 남북 1.2㎞, 동서 350m에 달하는 성터가 남아 있다. 성벽이 3~5m에 달하는 토성으로 외성은 전체 길이가 8㎞가 넘는다고 한다. 스위픈강가에서 보면 이 산성이 보인다.

‘하산(읍)’은 블라디보스토크 서쪽, 우수리스크 남쪽에 있는 하산군의 최남단에 있다. 군 시설, 그리고 무장한 군인들만 간혹 보이는 그야말로 음침하고 삭막한 국경 마을 그 자체였다. 북·중·러 3국 접경지역으로 출입 자체가 엄격히 금지돼 있고 러시아 당국의 엄격한 허가를 받아야 출입이 가능하다.

차에서 내려 오솔길을 걸어 두만강 쪽으로 가니 수풀 사이로 두만강철교가 예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나타나는 회색 줄기의 두만강. 아! 두만강이다. 저 너머가 바로 북한 땅인데 좁은 강폭의 강물은 무심코 국경을 가르고 있다. 하산에 접경한 중국은 훈춘의 팡촨에서 국경이 끊어져 태평양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육로로 단 16㎞에 지나지 않는 거리이다. 중국은 이곳에 태평양이 보이도록 팡촨탑을 세웠다. 태평양을 향한 중국의 염원이 엿보이는 상징물이다.

‘크라스키노’는 두만강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하산군의 북쪽 마을이다. 이곳은 동해 바다에 접하고 있는 약 3,500명의 인구가 사는 작은 해변 마을인데 발해의 염주성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크라스키노 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2.5㎞를 가면 좌측으로 드넓은 습지가 나타난다. 이 습지에서 약 0.9㎞ 정도 남쪽으로 가면 철길을 만나고 이 철길을 지나 수풀을 헤치고 걸어 1.8㎞ 정도 더 가면 발해의 크라스키노 성터에 이른다. 습지가 얼어 통행이 가능한 계절을 택해 어렵사리 염주성을 찾게 됐다. 성벽의 외곽과 세 군데 성문, 옹성의 흔적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성터는 남북 380m, 동서 300m의 넓이로 많은 유물들이 발굴된 바 있고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연추마을’은 크라스키노 인근에 있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크라스키노의 하산영웅탑에서 보면 이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연추 마을은 ‘지신허’와 함께 연해주의 대표적 초기 한인 마을로 지리적으로 두만강과 가까워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곳이다. 이곳은 연해주 의병활동의 중심지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국경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다. ‘동의회’의 본부가 있었으며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동지가 무명지를 끊어 조국광복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안중근 의사는 이곳에서 때를 기다리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는 거사를 단행했고 이듬해 봄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이를 기념해 크라스키노에는 2011년 단지동맹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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