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527년 영국 튜더왕조의 헨리 8세는 대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 20년간 함께했던 왕비와 헤어지고 정부인 궁녀 앤 블린과 결혼하려 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왕비의 조카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반대했다. 이들과의 갈등이 커지자 헨리 8세는 결국 1534년 영국 왕을 영국 교회 수장으로 규정하는 수장령(首長令)을 선포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공식 결별했다. 이는 영국이 유럽대륙과 거리를 두는 계기가 됐다.
#2. 유럽 국가들은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설립조약을 체결하고 통합작업을 시작했다. 유럽연합(EU)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를 1958년 창설했다. 영국은 1973년에서야 EEC에 가입했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오일 쇼크에 경제가 어려워지자 1975년 EEC 잔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했다. 67.2%가 잔류를 택하기는 했지만 국민투표는 영국의 고립주의 전통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영예로운 고립 (Splendid Isolation)’을 외교 노선으로 삼아왔다. 유럽대륙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현상을 유지(Status Quo)하면서 필요할 때만 개입해 국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영예로운 고립이라는 말은 19세기 중엽 크림전쟁 이후 영국이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않는다는 독자노선에서 비롯됐다.
영국 역사에서 영예로운 고립은 국익과 철저하게 맞닿아 있다. 영국은 유럽과의 공동체적 관계가 국익에 무익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판을 깼다. 과거 고립주의는 실제로 영국에 이득이 됐다. 영국은 헨리 8세 이후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를 지지했던 영국인들의 가슴 속에는 과거 영예로운 고립을 통해 대영제국을 건설했던 향수가 남아 있다. EU의 주도권을 독일과 프랑스에 빼앗긴 상황에서 브렉시트를 통해 독자노선을 걷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영국은 한때 세계를 주무르던 나라여서 주권이 침해당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며 “EU에 한쪽 발을 걸치자는 의회와 달리 일반인들은 왜 영국이 아직 EU에 남아 있느냐는 입장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브렉시트 결정 이후 2년 9개월여. 영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외통수에 걸렸다. 나라의 운명을 EU에 맡기고 투항하느냐, 이대로 ‘노딜(No Deal)’ 브렉시트를 감행해 EU의 변방 국가로 전락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영국이 유럽과 거리를 두게 된 역사적 배경=유럽대륙은 힘의 역학관계에 따라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역사를 갖고 있다. 반면 섬나라인 영국은 이민족이나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았던 사례가 극히 드물다. 사례를 찾자면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브리튼섬 침략으로 400년간 로마의 식민지통치를 받은 것과 1066년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만족의 정복으로 프랑스어와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받아들인 정도다. 영국은 이후 1,000년이 넘는 현재까지 단 한 번도 이민족과 다른 나라에 정복된 적이 없다.
영국이 유럽대륙과 거리를 두게 된 사례로 프랑스와 벌인 100년 전쟁을 꼽는 역사가들이 많다.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영국과 프랑스 왕조가 116년 동안 싸운 전쟁이다. 양국 모두 이를 통해 현재의 국민 정체성이 싹텄다. 영국은 프랑스를 곧 유럽으로 여기며 반유럽 정서를 키웠다. 헨리 8세가 1534년 수장령으로 로마 교황청과 결별한 사건 역시 유럽 대륙과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역사상 최초의 브렉시트로 평가된다. 영국은 지금도 수장령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이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기틀을 완성한 것은 엘리자베스 1세 때다.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의 딸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함대는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동인도 회사를 세워 영국의 식민 패권시대를 열었다. 영국은 나폴레옹이 물러난 후 크림전쟁으로 유럽대륙에 군사적 개입을 할 때까지 전 세계 식민통치를 통해 영예로운 고립을 즐겼다.
20세기는 영국과 영국인들이 바다 건너 유럽대륙에 대한 불안감과 적대감을 동시에 키운 시기다. 독일이 주도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역사 속에서 누적된 반유럽 정서가 한층 커졌다. 종전 이후에도 영국인들은 프랑스와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 통합에 대한 거부감과 경계심을 낮추지 않았다. EU 회원국이지만 유로화 중심의 화폐 통합에는 참여하지 않고 EU 주변국으로 머물러 있는 것도 이런 이유로 풀이된다. 2016년 6월 브렉시트 결정 역시 EU 탈퇴를 원하는 영국인들의 정체성과 자존심에서 기인한다. 브렉시트를 촉발한 또 다른 사례로 꼽히는 이민자 문제 역시 영국인들의 일자리와 임금, 복지에 위협이 된다는 자국 이기주의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영예로운 고립을 정치 수단화한 보수당=브렉시트의 또 다른 이유를 영국 보수당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보수당의 전신은 지주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던 토리당이다. ‘브렉시트를 대비하라(조명진·2016년)’에 따르면 보수당은 처음부터 유럽 통합에 반대 입장이었다. EEC 가입에서 브렉시트 탈퇴 결정까지 46년간 영국의 유럽 통합 대열 참여와 이탈 과정이 모두 보수당의 주도로 벌어졌다.
보수당 정부는 EU의 전신인 EEC 가입 직후 국민투표를 통해 잔류 여부를 물었다. 당시에는 잔류 결정이 났지만 이 같은 전통은 보수당 정부에 의해 계속 유지된다. 1975년 보수당 당수가 된 마거릿 대처 총리 역시 EEC 분담금의 환불을 요구하는 등 부정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대처의 후임인 존 메이저 총리도 단일통화와 EU 노동자 권리를 보호하는 새로운 헌장에 참여하지 않는 등 EU와 삐걱거렸다. 영국은 1997년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총리가 되면서 EU와 안정적 관계로 돌아섰다. 고든 브라운과 에드 밀리밴드 총리가 후임으로 노동당 정부를 이끌 때도 친 EU 정책이 유지됐다.
그러나 2010년 보수당이 다시 집권하면서 브렉시트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영국 정부는 어떤 상황에서든 EU 회원국 지위를 유지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보수당 내부에서 강경파가 득세하면서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EU에서 벗어나 홀로 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 난민 문제까지 겹치며 보수당 지도부의 입지가 좁아졌다. 결국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2015년 5월 총선에서 보수당의 재집권을 위해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라는 정치 도박을 감행한다.
보수당은 영예로운 고립이라는 국민 정서를 건드려 재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영국의 국론이 분열되고 영국인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영국은 아직도 브렉시트 국민투표율인 51.9% 대 48.1%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지금은 결과가 뒤바뀌었을까. 영국은 아직 어디로 갈지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 어떤 결론이 나든 브렉시트는 정치권의 잘못된 판단으로 명분은 물론 실리까지 모두 잃어버린 대표적인 사례로 남을 것이다. /김정곤 논설위원 mckid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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