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정부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핵심 식료품 가격을 동결했다. 마이너스 성장, 물가 폭등으로 올해 10월 대선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친시장 개혁정책을 펴온 중도 우파 마크리 대통령이 물가에 손을 댄 것이다. 아르헨티나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사실을 망각한 채 포퓰리즘이 난무하던 과거로 돌아갈 조짐이 일면서 지난해 급한 불을 끈 아르헨티나 경제가 또다시 역풍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17일(현지시간) 대통령 홈페이지에서 국내 기업들과의 협의를 통해 식료품 64개의 가격을 적어도 오는 10월 말까지 동결한다고 밝혔다. 동결 품목에는 식용유·밀가루·요거트·잼·마테차 등 핵심 생필품들이 포함됐다.
정부는 이 밖에도 이동통신사들과 6개월간 통신비 가격을 동결하기로 합의했으며 육류 가격도 낮은 수준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인플레이션의 주범으로 꼽혀온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에 대한 세율도 더 이상 높이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성명에서 “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낮추고 75년간 겪은 이 문제(인플레이션)를 끝내려면 우리 정부가 지난 수년간 매달려온 구조적 변화가 필수적이라고 확신한다”며 이번 조치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친시장 정책을 펴온 마크리 정부가 물가 통제라는 극약 처방에 손을 댄 것은 연일 치솟는 물가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로 정권의 지지기반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아르헨티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54.73%를 기록하며 1월(49.31%), 2월(51.28%)에 이어 3개월 연속으로 가파른 오름세를 이어갔다. 2012년 8월 이후 두자릿수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는 아르헨티나 물가는 올해 들어서만 11.8%나 오른 상태다. 치솟는 물가와는 대조적으로 경제성장률은 고꾸라지는 상황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아르헨티나는 지난해 3분기 연속으로 역성장해 2018년 연간 성장률은 -2.5%에 그친 것으로 추정된다. OECD는 아르헨티나의 올해 성장률을 -1.5%로 전망하고 있어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번 조치에 대해 “마크리 정부는 국민들에게 자신의 재임 기간 중 두 번째 불황이 오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내놓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시장에서는 경제난으로 지난해 정부 지지율이 20%대로 추락한 가운데 10월 대선을 앞둔 마크리 대통령이 민심을 잡기 위해 좌파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페소화 가치 추락을 저지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60%대로 대폭 끌어올리고 IMF 부채를 갚기 위해 정부가 전기·교통 보조금을 대거 삭감하면서 생활이 팍팍해진 아르헨티나 국민들 사이에서는 마크리 정부에 대한 반발이 거세다. 이 때문에 마크리 정부가 선거를 앞두고 바닥 수준인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논란을 감수하고 물가 동결 등 선심성 정책으로 돌아선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기록적인 물가 상승률이 마크리 대통령의 지지율을 갉아먹자 과거 논란을 부른 가격 통제가 등장했다”면서 “이는 10월 대선을 앞두고 아르헨티나가 포퓰리즘으로 돌아가는 길을 닦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크리 대통령은 지난달 국정연설에서도 “복지지출 목표를 높일 여유가 있다”며 아이가 있는 빈곤 가정에 대한 보조금을 46% 늘리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경제 상황이 변하지 않은 가운데 이뤄지는 단기적인 물가 통제는 큰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지난해 IMF로부터 563억달러의 구제금융 지원금을 받은 대가로 구조개혁에 힘써야 할 아르헨티나가 포퓰리즘 정책으로 회귀하는 것이 오히려 시장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회사인 멜레니아 코스타리카의 페르난도 페르티니는 마크리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을 ‘마크라이시스(Macrisis)’로 표현하면서 “마크라이시스는 변동성을 높이고 투기꾼들에게 기회가 될 것”이라면서 “경제난에 고통받는 국민들이 과연 그에게 표를 던져줄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김창영기자 kc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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