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가 됐으니 저는 퇴근합니다.”
한창 바쁜 일본 도쿄의 한 회사 사무실에 경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야근에 익숙한 다른 직원들이 놀란 눈으로 “네?”라고 되묻자 정시 퇴근을 외친 주인공은 오후6시를 알리는 시계를 가리킨다.
조직논리가 지배하는 일본의 현실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이 상황은 지금 일본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속 이야기다. 제목부터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라는 이 작품은 과거 야근과 극심한 과로로 아픔을 겪은 여주인공이 일과 일상의 균형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내용으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드라마의 인기와 맞물려 화두에 오른 것이 지난 4월1일부터 장시간 노동을 방지하기 위해 실행된 ‘일하는 방법 개혁안’이다. 이른바 일본판 ‘주 52시간 근로제’로 불리는 이 개혁안의 여파로 ‘야근 왕국’ 일본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아베 신조 정권이 장시간 노동에 대한 해결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한 이 노동제도는 ‘연장근로 월 45시간·연 360시간 상한제 도입’ ‘연차휴가 연 5일 강제사용’ 등 노동생산성 향상에 방점을 찍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연장근로 상한제 도입이다. 노동기준법에는 이전에도 ‘월 45시간’ 연장근로 상한 규정이 명시됐지만 노사 협약으로 추가 연장근로가 가능했고 별도의 벌칙조항이 없어 유명무실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70년 만의 법 개정으로 노사 협약에 의한 장시간 연장근로가 불가능하게 됐다. 규정 위반 시 6개월 이하의 징역에 처해지거나 30만엔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된다. 개정된 법은 대기업에 먼저 적용되고 중소기업은 오는 2020년 4월, 건설과 자동차운송업 등 일부 업종에서는 2024년 4월부터 시행된다.
일본이 ‘장시간 연장근무’ 근절에 나선 이유는 고질적인 야근업무가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문제의식에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조사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일본 근로자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1,710시간으로 OECD 평균(1,746시간)보다는 짧았지만 독일(1,356시간), 영국(1,543시간) 등 선진국과 비교하면 긴 편이다. 구체적으로는 2015년 대형 광고회사 덴쓰에 입사한 신입 여직원이 하루 20시간 근무하는 생활을 이어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불씨가 됐다.
장시간 근무가 일본에 고착화한 데는 기업들이 신입직원에게 특정 직무를 부여하는 대신 직원 채용 후 업무 발생 때마다 일을 맡기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구조적인 요인이 깔려 있다. 업무 전문성이나 숙련도 면에서 근무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본급이 낮고 초과근무수당이 높은 급여체계 역시 장시간 근무를 부추겼다.
구조적 문제에 유명무실한 법규까지 더해져 일본에서 불법적인 연장근로는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후생노동성이 2017년 7,635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과중노동 상황을 점검한 결과 5,029개(65.9%) 업체가 노동기준관계법을 위반했으며 그중 가장 많은 37.3%의 위반 내용은 ‘시간 외 노동’이었다.
일본 기업들은 일하는 방식을 개혁하자는 취지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극심한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기존 업무 방식과 비즈니스 모델로는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주요 기업들은 지난해 말부터 일찌감치 자체 개혁안을 시범 운영하고 있다. 의류 업체 하루야마홀딩스는 ‘노(no) 잔업수당’ 제도를 도입해 잔업시간 ‘제로’인 직원에게 월 1만5,000엔을 지급한다. 이후 직원들의 평균 초과근무시간은 도입 전 10.4시간에서 8.9시간으로 15% 줄었다.
하지만 모든 기업과 근로자가 변화를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 근로시간 감축으로 소득이 줄어드는 것이 문제다. 기본급보다 초과근무수당이 상대적으로 높은 급여체제에서 잔업 감소는 가계에 부담이 된다. 생활의 상당 부분을 잔업수당에 의존하는 ‘생활형 잔업’ 인구는 말할 것도 없다. 미즈호종합연구소의 추산 결과 야근이 월 60시간 미만으로 줄면 근로자 1인당 연 86만7,000엔의 수입이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입장에서는 노동시간 감소가 생산활동을 억지하는 요인이 된다. 닛세이기초연구소는 “근로시간 감소는 노동투입 감소로 이어져 생산활동을 억제할 수 있다”며 “현재 업무 형태를 유지하는 한 기업이 실적을 이전처럼 유지하는 게 어려울 수 있어 업무 방식의 개혁이 필수”라고 지적했다. 식품 업체 아지노모토는 ‘일정 수준 이상의 노동시간 단축은 폐해를 낳는다’며 2020년까지 ‘하루 근로 7시간’을 달성한다던 계획을 철회했다. 이 회사는 2017년 7시간35분이던 소정 근로시간을 최근까지 7시간15분(오전8시15분~오후4시30분)으로 20분 단축했다. 그러나 근무시간이 줄면서 ‘시간 내 작업완료’에 얽매이는 사례가 생겼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새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어려워진다는 경영진의 판단에 따라 계획 철회를 결정했다. 다카아키 니시이 사장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시간으로 일하는 방식을 요구하는 단계는 지났다”며 “앞으로는 얼마나 창조적인 일에 시간을 할애하는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근무시간 감소가 생산성과 직결되는 중소기업의 경우 법 적용에 따른 타격이 크다는 우려와 경직된 조직문화 탓에 비공식적인 잔업은 이어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만만치 않다. /도쿄=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