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금융 이후 8년간의 긴축정책에 지친 그리스 국민들이 총선에서 친시장 성향의 우파 정당을 선택하며 그리스의 정치 지형도를 바꿔놓았다. 구제금융을 초래한 우파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 속에 지난 2015년 그리스 역사상 처음으로 정권을 잡은 급진좌파는 계속되는 경기 침체에 대한 분노 속에 4년여 만에 다시 중도우파인 신민주당(신민당)에 정권을 돌려주게 됐다. 다만 경제 성장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며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신민당은 앞으로 재정지출을 늘리겠다고 공언하고 나서 유럽연합(EU)과의 마찰을 예고했다.
8일(현지시간) 전날 실시된 그리스 총선에서 40% 가까운 득표로 31.5%에 그친 현 집권 여당인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을 꺾고 4년6개월 만에 정권을 탈환한 중도우파 신민당의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대표가 총리에 취임했다. 미초타키스 대표는 이날 오전 프로코피스 파블로풀로스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 앞에서 총리 선서를 하면서 지난 4년 반 동안 그리스를 이끌어온 알렉시스 치프라스 시리자 대표로부터 총리 자리를 물려받았다.
전날 총선에서 압승한 신민당은 제1당에 의석을 추가로 주는 그리스 선거제도에 따라 전체 의석 300석 중 158석을 얻으면서 다른 정당과의 연합 없이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됐다.
반면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이끄는 시리자의 의석수는 현재 144석에서 86석으로 줄어 제2당으로 밀려났다.
총선 승리로 차기 총리가 된 미초타키스 대표는 TV 연설을 통해 “고통스러운 한 시대는 끝났다. 그리스는 자랑스럽게 재도약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치프라스 총리는 지난해 8월 구제금융 체제를 종식하고 국호 분쟁을 벌이던 북마케도니아와 역사적인 합의를 도출하며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오랜 긴축체제의 피로감에 국내 민심이 돌아서며 집권 4년여 만에 정권을 내준 것으로 분석된다. 그리스는 앞서 2,890억유로(370조원)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아 파산위기를 넘겼지만 국제채권단의 요구로 강도 높은 구조개혁과 혹독한 긴축재정을 실행해왔다. 이로 인해 급여와 연금은 3분의1가량으로 쪼그라들었고 그리스의 국가 경제 규모가 4분의1가량 축소되는 등 경제적 부담이 커졌다.
국민적 고통이 계속되자 치프라스 총리는 국제채권단이 요구하는 긴축을 거부하겠다는 공약을 앞세워 2015년 1월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결국 채권단에 백기를 들고 채권단이 요구한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청년 실업률은 40%까지 치솟았고 젊은 지지층이 돌아선 것이 이번 지지율 하락의 결정적 원인이 됐다.
게다가 북마케도니아의 국명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도 그리스의 정체성을 중시하는 국수주의자들과 보수파의 등을 돌리게 했다. 지난해 7월 아테네 근교 휴양지에서 발생해 101명의 목숨을 앗아간 산불에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이번 선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번 총선에서 신민당이 압승하면서 그리스는 시장친화적 정책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신민당이 다른 정당과 제휴 없이 단독정부 구성이 가능해지면서 미초타키스 대표는 총리로서 큰 실권을 갖고 그가 공약한 경제성장과 외국인 투자, 세금 인하, 공기업 민영화, 양질의 일자리 창출 등의 정책을 펼칠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의 명문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국제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 등에서 경력을 쌓은 은행가 출신인 미초타키스 대표는 그리스 보수파의 거두인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 전 총리의 아들이다.
일각에서는 엘리트 출신의 그가 총리직에 오르면 노동자의 권리가 크게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 그는 2013~2015년 안토니스 사마라스 내각에서 개혁행정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공공 부문의 일자리를 대폭 삭감한 전력이 있다.
또 그는 국제채권단과 긴축 관련 재협상을 해 재정지출을 늘릴 것이라고 공언해 온 터여서 앞으로 수년간 그리스가 채권단의 엄격한 재정감독을 받을 것을 요구하는 EU와의 마찰도 예상되고 있다.
/노현섭기자 hit812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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