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내 신상품 개발팀에서 일하는 A씨는 재량근로 대상에 포함돼 근로계약을 맺었다. 속한 곳은 개발 부서지만 C씨의 일은 단순히 소프트웨어(SW)를 작성하고 데이터ㆍ통계 등을 정리하는 보조적 성격이 강했다. 재량근로제의 적용 여부는 개별 노동자가 맡은 업무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C씨는 재량근로제의 적용을 받을 수 없다.
#광고회사에서 제작 업무를 맡고 있는 B씨는 얼마 전 석 달 이상 걸리는 프로젝트를 배정받았다. 팀장은 업무를 주 단위로 나눠서 팀원들에게 분배했다. 다만 팀원들이 재량근로제를 적용받는 점을 고려해 세세한 지시는 내리지 않았다. 재량근로제를 위반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주 단위 안에서는 자율적인 시간 배분이 가능해야 하고, 구체적 업무지시는 이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주당 근로시간 상한선이 52시간으로 단축되면서 각종 유연근로제 중 하나인 재량근로제도 효용성을 주목받고 있지만 활용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많다. 재량근로제는 업무 수행 방법을 노동자에게 위임할 필요가 있는 일부 업무에 한해 사용자가 노동자 대표와 서면 합의로 정한 시간을 노동시간으로 간주하는 제도다. 어떤 업무에 적용할 수 있는지, 업무지시가 가능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모호하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이에 고용노동부는 31일 재량근로제의 구체적 운영 지침을 담아 ‘재량근로제 운영 안내서’를 발표했다.
고용부가 운영 안내서를 내놓으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재량근로제를 채택한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할 수 있는 지시의 범위를 판단할 구체적 기준이다. 우선 사용자는 재량근로제를 도입했다고 해도 업무 수행 수단 및 시간 배분과 관계없는 기본적인 목표ㆍ내용ㆍ기한ㆍ근무지 등에 관한 지시는 가능하다. 업무의 진행 상황 및 정보공유 차원의 회의도 소집할 수 있다. 출장, 출근 등의 의무를 부여하고 출퇴근 기록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시간 배분에 제한을 받을 정도로 빈번하게 회의를 잡거나 시일이 걸리는 프로젝트의 업무결과를 매일 작성하도록 하는 등의 행위는 허용되지 않는다. 근로시간을 분배할 때는 일반 노동자 수준의 빡빡한 출퇴근 시각을 적용하면 안 된다. 재량근로제의 취지에 맞게 1주 단위 이상으로 업무를 부여하거나 업무 수행에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간만 입력해야 한다.
재량근로제를 적용할 수 있는 업무의 범위도 구체화했다. 적용 가능한 업무는 연구개발(R&D), 정보통신기술(ICT), 언론ㆍ출판, 디자인 등 14개다. 이 중 R&D의 경우 게임ㆍ금융상품 등 무형 제품 관련 업무도 포함하도록 했으며, 디자인 역시 그 대상을 무대ㆍ세트ㆍ디스플레이로 넓혔다. 또한 정보처리시스템 설계·분석 과정에서 일원으로 참가하는 프로그래머도 재량근로 대상이다.
아울러 고용부는 고시를 개정해 재량근로제를 적용할 수 있는 업무에 금융투자분석(애널리스트), 투자자산운용(펀드매니저)를 추가했다고 이날 밝혔다. 고용부는 “업무 성격상 노동자에게 재량이 보장되고 노동량보다 질과 성과에 따라 보수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재량근로제 취지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IB(투자은행) 업무는 업계의 정식 요청과 실태조사가 없다는 이유로 포함하지 않았다. 반면 노동계는 근로시간 단축의 취지를 거스를 뿐 아니라 고용 확대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민주노총 사무금융노조는 이달 초 고용노동부에 두 업무의 재량근로제 대상 포함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낸 바 있다.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가 다른 노동자들과 근무형태와 임금구조가 다르지 않은데 재량근로제로 넣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노조 관계자는 “앞으로 이를 무효화하기 위한 행정소송을 내고 국회 차원에서도 압박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박준호기자 violato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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