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사우디 경제의 대부분을 주물러온 칼리드 알팔리 에너지장관을 전격 해임하고 압둘아지즈 빈 살만 왕자를 새로운 에너지장관으로 임명했다. 지난 수년 동안 세계 석유 산업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알팔리가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의 대표직에서 물러난 지 불과 일주일도 안 돼 에너지장관 자리에서까지 해임됐다는 소식은 시장에 적잖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새다.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이 주요 장관직에 왕가의 인물들을 임명하지 않는다는 오랜 불문율까지 깨며 단행한 이번 인사는 사우디 경제는 물론 국제유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8일 아침(현지시간) 공개된 사우디 국왕 포고령을 인용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이복형이자 에너지 문제 담당 국무장관인 압둘아지즈 빈 살만 왕자가 에너지장관으로 임명됐다고 보도했다. 압둘아지즈 빈 살만 왕자는 30여년간 석유 및 에너지 담당자로 일해온 석유 전문가로 꼽힌다.
이로써 지난달 에너지부가 산업개발과 광물 부문으로 분리되면서 영향력이 위축됐던 알팔리 전 장관은 사우디 정부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됐다. 그동안 빈 살만 왕세자의 측근으로 아람코 기업공개(IPO) 등 왕세자의 개혁을 함께 추진해왔던 알팔리 전 장관이 아람코 대표직에 이어 에너지부에서도 해임된 데 대해 시장에서는 예상외라는 반응도 일부 있지만 이번 사우디 왕실의 결정이 빈 살만 왕세자의 본격적인 개혁을 위한 신호탄이라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FT는 “아람코 IPO가 미뤄지는 등 사우디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들이 지지부진한 데 대해 (왕실이) 알팔리 전 장관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사우디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 비전 2030’이라는 경제 개혁을 주도하면서 사우디의 경제 근간인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수익원을 다각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친서방적인 왕세자의 개혁에 대해 국가 원로들을 비롯한 내부 반발이 거세지면서 개혁 속도는 상당히 늦춰지고 있다. 왕세자의 측근으로 알려진 알팔리 전 장관 역시 대외적으로는 왕세자를 지지하면서도 실상은 개혁을 탐탁지 않아 했다는 점이 이번 인사의 배경이 됐다는 분석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아람코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알팔리 전 장관은 아람코 IPO와 사우디를 주요 태양열 에너지 생산 국가로 만들려는 왕세자의 계획을 공개적으로 지지해왔지만 그는 왕세자의 이러한 개혁 프로젝트의 규모를 축소하거나 진행속도를 줄이는 데 더 노력했다”고 전했다.
결국 사우디 왕실은 개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알팔리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왕세자의 측근과 왕족을 앉혀 왕세자의 개혁정책에 힘을 보탰다는 분석이다. 3일 알팔리를 대신해 아람코 회장으로 앉힌 야세르 알루마얀 사우디 국부펀드(PIF) 총재 역시 빈 살만 왕세자의 최측근이라는 점도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60달러 미만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유 가격도 이번 인사 배경으로 풀이되고 있다. 유가 하락으로 아람코의 공모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낮은 가격에 형성되면서 당초 지난해 하반기로 예정됐던 IPO가 미뤄진 상태다. ABC뉴스는 “개혁을 위한 사우디 예산의 균형을 맞추고 아람코의 IPO에서 원하는 가격을 받기 위해서는 브렌트유 기준으로 배럴당 80~84달러선까지 가격이 올라야 한다”며 “알팔리의 경질은 유가가 60달러 밑으로 떨어진 영향도 크다”고 지적했다.
시장에서는 앞으로 사우디가 국제유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보다 공격적으로 나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사우디가 개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감산폭을 더욱 늘려 유가를 의도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WSJ도 “빈 살만 왕자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내에서도 매파로 통하고 있다”며 “지금까지 가격과 시장 균형을 맞추기 위해 원유 공급을 줄이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사우디 석유정책인 감산에 의한 유가 상승 기조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현섭기자 hit812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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