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순결’ ‘정숙’ ‘헌신’과 같은 단어들은 1970년대 여성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다. 동시에 가부장적인 질서에 순응하면서 억압과 폭력, 차별을 견뎌야만 했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가능했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비겁하고 한심했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어떨까? 그런 점에서 ‘소설 빛의 과거’(문학과 지성사 펴냄)에 ‘기성세대 반성문’이란 꼬리표가 붙었는지도 모른다.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작가 은희경을 만났다. 그가 7년 만에 들고 나온 소설은 2017년 60대인 김유경이 1977년 20대를 회상하며 시작된다. 소설은 여대에 갓 입학한 새내기 김유경과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대 기숙사를 배경으로 당시 여성들이 견뎌내야 했던 차별, 억압, 편견, 폭력과 같은 시대상을 은희경식 표현들로 적나라하게 풀어냈다. 술 대신 과자 부스러기를 앞에 놓고 대화했으며 통금시간에 맞춰 돌아와야만 퇴실을 면할 수 있었다.
은 작가는 “‘70년대에 여성들이 뭘 했겠어’라는 선입견과 달리 당시 우리에게도 미래에 대한 꿈과 환상이 있었고, 일탈을 통해서 자기를 증명하려는 모험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며 “젊은 독자들이 기성세대의 아픔을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성별, 연령별로 타인을 대상화된 존재로만 바라보는 게 아닌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폭넓은 안목이 있었으면 좋겠는 생각을 담았다”고 털어놨다.
주인공 유경은 동시대를 산 작가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다. 말을 더듬어 웅변학원을 다닌 것부터 지방에서 상경해 여대 기숙사에서 대학 시절을 보낸 것, 학보사 기자로 활동한 것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그는 “소설 속 유경이라는 인물에 가장 많이 투영돼 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작가로 활동하는 김희진에서도 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며 “두 인물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인생을 살아가지만 결국엔 하나의 빛으로 섞여 흘러간다”고 설명했다.
소설에서 유경은 말 더듬는 습관 때문에 소극적이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소신과 강단 있는 인물로 비쳐진다. 그러나 이런 환상은 친구의 소설을 읽고 한순간 깨져버린다. 유경은 희진의 소설을 통해 자신이 기억하는 대학 시절의 모습은 온전히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 허구임을 깨닫게 된다. 은 작가는 “누구나 자신의 과거를 자기중심적으로 편집하려고 하지만 실상은 당시의 삶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조금은 비겁하고 편협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나부터 그런 스스로 받아들이면서 소설을 썼다”고 고백했다.
이런 과정은 작품을 구상하는 내내 이어졌다. 지난 10년간 같은 주제를 갖고 무엇을 써야 할 지 고민했고, 글을 쓰는 데에만 꼬박 5년이 걸렸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15년 만에 완성된 셈이다. 그는 “처음 소설을 쓰려고 했을 때는 청춘의 열기와 꿈을 담아내려고 했다. 막상 쓰다 보니까 제 청춘이 너무 졸렬하고 라이브했다”며 “확신이 서지 않아 고민하던 중 당시 일기장과 수습기자 시절 노트를 들춰보니 낭만화하기는 어려운 시절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소설을 쓰면서는 객관적으로 시선으로 현재의 좌표를 정확히 읽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소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세대에 과거의 진실을 알리는 것을 넘어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과 자기반성도 담겨 있다. 은 작가는 “‘빛의 과거’라는 말은 과거에 쏘아진 빛이 현재에 어떤 모습을 연출해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라며 “이는 결국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아 다음 세대에 숙제를 남긴 기성세대의 반성문이자 고백”이라고 했다.
이번 작품은 장편소설로는 7년, 단편소설로는 3년 만이다. 오랜만에 만남이기 때문에 벌써부터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도 모아지고 있다. 그는 “당분간 작품계획은 없다”면서도 “데뷔 이후 25년간 총 14권을 냈기 때문에 평균 2년에 한번 꼴로 책을 낸 셈이다. 앞으로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빛의 과거라는 힘든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조금 더 속도를 내 볼 생각이다”라고 전했다.
/최성욱기자 secre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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