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대공황은 왜 그렇게 광범위한 지역을 강타했는가. 왜 그토록 심각했고 오랫동안 지속됐으며 결국 2차대전으로 이어졌는가. 1차대전 후 패권국이 된 미국이 옛 패권국 영국이 했던 역할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역사가인 찰스 킨들버거는 그의 저서 ‘대공황의 세계 1929-1939’에서 세계적 혼란을 초래한 원인을 리더십 공백에서 찾았다. 힘 있는 나라가 패권국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거나 거부하면 세계는 전쟁의 늪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이 이론을 ‘킨들버거 함정(kindleberger trap)’이라고 불렀다. 패권국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론이다.
킨들버거는 1930~1940년대 미국 재무성·연방준비위원회·국무성 등의 요직도 두루 거친 석학이다. 황폐해진 서유럽 부흥을 위해 마셜플랜을 기획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패권국이 해야 할 역할을 다섯 가지로 꼽았다. △개방 시장 유지 △안정적인 장기 대부 공급 △안정된 환율 시스템 유지 △각국의 거시정책 조율 △금융위기 시 최후의 대부자 역할 수행이다. 전체 이익을 위해 자기 희생도 하는 게 패권국의 덕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공황이 심각해지고 있는 가운데 자국 이익을 위해 100년래 최고의 관세를 매겼다. 이는 다른 나라의 연쇄 관세보복과 세계교역 급감, 국제통화 시스템 불안정으로 이어져 세계적인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한 후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펴면서 패권국가의 리더십을 상실해가고 있다. 고립주의를 강화하고 보호무역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전 세계에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관세 폭탄을 퍼붓는가 하면 동맹국을 대상으로 국방비 부담도 떠넘기고 있다. 미국발 대공황이 재연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마당이다.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은 최근 니어재단 주최 세미나에서 “세계 경제는 글로벌 리더십 부재에 따른 불확실성 증대로 킨들버거 함정과 유사한 혼돈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세계가 대공황이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우려다. 이처럼 어려워지는 세상에 우리는 북핵과 장기불황이라는 과제도 떠안고 있다. 냉철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오현환 논설위원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