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 신도시는 베드타운을 넘어 자족 도시 기능을 갖춘 2기 신도시의 간판이다. 인근 분당 신도시보다 용적률도 낮아 쾌적한 주거 환경이 돋보이는 곳이다. 내로라하는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 즐비한 동판교와 달리 서판교는 산자락으로 둘러싸여 전원 도시를 연상하게 한다. 간혹 새소리도 들리는 한적한 판교 아파트촌이 들썩이고 있다. 판교 지하철역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위치한 서판교 산운마을 11단지. 한글날인 9일 오전 실개천과 산책로를 가로지르는 다리 난간에는 각종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다리를 넘다 보니 정면 아파트 외벽 전체를 “죽을 수는 있어도 쫓겨날 수 없다” “여기는 우리 집” 등의 글귀로 도배한 초대형 현수막이 시야에 들어왔다. 10년 임대아파트의 분양 전환 가격을 두고 입주민과 사업자 측의 갈등이 첨예하게 부닥치는 현장이다.
인근 12단지를 포함한 이곳에서는 20평형대 소형(전용 51㎡·59㎡) 임대아파트 1,014가구가 지난달로 10년 임대 기간이 종료돼 분양 전환을 앞두고 있다. 사업자인 LH공사 측은 “법대로 감정 가격에 분양할 수밖에 없다”는 원칙론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 입주민들은 “높은 분양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쫓겨날 판”이라며 하소연하고 있다. 산책 나온 주민 김모씨는 “감정 가격대로 분양가를 결정한다면 사업자 배만 불리는 꼴”이라며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것은 정부의 정책 실패 탓인데 왜 집 없는 서민에게 책임을 전가하느냐”고 성토했다. LH 측은 현재 성남시에 감정 가격 산정을 의뢰해놓고 있다.
현행 임대주택법은 5년 임대아파트의 분양 전환 기준가는 건설 원가와 감정평가 금액의 산술평균으로 책정하는 반면 10년 임대의 경우 ‘감정 가격을 초과할 수 없다’고 상한선만 규정해 놓고 있다. 감정 가격은 대부분 시세의 80% 안팎에서 결정된다. 서로 다른 기준부터 갈등을 잉태했지만 임대기간이 길수록 자금이 묶이는 탓에 사업자 유인과 임대주택 공급 확대를 위해 그런 차이를 뒀다는 게 국토교통부의 설명이다.
11단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의 산운마을 8단지 부영아파트는 이미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주민들의 시위 등 극심한 진통 끝에 분양 전환 가격이 확정돼 올해 말까지 계약을 앞두고 있다. 분양 전환 가격을 승인한 성남시청을 성토하는 대형 현수막 뒤로 “서민에게 시세 감정가 웬 말인가” “총선 때 심판하겠다”는 플래카드가 베란다마다 걸려 있었다. 이 일대는 민간 주택업체가 지은 10년 공공임대 아파트 4개 단지 1,692가구가 분양 전환 중이다. 판교 신도시 가운데 가장 먼저 분양 전환 시점이 도래한 곳이다. 단지 인근에서 영업하는 한 부동산 중개사는 “상대적으로 시세가 낮은 부영아파트는 몇몇 매물이 나와 있다”며 “이 중 일부는 분양대금을 마련하지 못해 미리 매물을 내놓은 곳”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반대의 목소리도 있다. 이웃마을에 사는 한 주부는 “우리는 1년 전 시세대로 인근 아파트를 샀다”며 “분양 전환 가격이 높다고 하지만 그래도 3억~4억원씩 시세차익을 챙기니 부러울 따름”이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문제가 된 10년 임대아파트는 참여정부가 처음으로 도입한 임대 유형으로 10년 동안 셋집에 살면서 자금을 모아 내 집을 장만하라는 게 정책 취지였다. 입주자에게 우선 분양권이 주어졌다. 당시에는 주거 복지 실현과 내 집 마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이상적인 제도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수도권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갈등을 유발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판교 분양 당시 30평형대(전용 85㎡) 중형 아파트 가격은 3억원대였지만 10년 전 입주 때는 6억원대로 오르더니 지금은 10억원을 호가한다. 분양 전환 가격은 중형이 6억~8억원대, 소형 임대의 경우 5억~6억원선이다. 소형 임대일수록 취약계층이 많아 이들이 10년간 수억원을 모으기가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다.
갈등을 증폭시킨 것은 지난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공약에서 10년 공공임대 아파트의 분양 전환 개선(대선 공약집 ‘나라를 나라답게’ 181쪽)을 약속했다. 앞서 20대 총선에서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분당 유세에서 “분양 가격 산정방식을 10년과 5년이 같도록 당론으로 채택해 통과시키겠다”고 했다. 전국 LH 공공임대아파트연합회 홈페이지에는 총선 당시 문 대표의 발언이 동영상으로 올라와 있다. 여기에다 분양가상한제 도입 방침은 갈등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산운마을 12단지 입주민인 김동령 연합회 회장은 “부자들에게 분양가상한제를 적용하겠다면서 정작 서민들에게 감정가로 분양하는 것이 온당한가”라고 반문하면서 “판교 분양 당시 적용한 분양가상한제로 분양 전환하든지 공약대로 5년과 10년이 같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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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저간의 사정을 모를 턱이 없다. 하지만 이미 3만여가구가 같은 방식으로 분양 전환한 선례가 있고 주택 가격이 오른 상태여서 ‘특혜’를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김현미 국토부 장관도 국회에서 원칙론을 밝혔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임대아파트는 판교 11개 단지 5,644가구 외에도 수원과 남양주 등 수도권 5만여가구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12만가구에 이른다. 예외를 허용하면 앞으로 모든 임대주택의 분양가를 낮춰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급기야 정부는 10년 임대를 더 이상 짓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판교 임대아파트 갈등은 부동산 개발이익을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지 해묵은 과제를 던지고 있다. 1990년대 분양가 통제 시절에는 채권입찰제로 개발이익을 환수했지만 분양가를 끌어올린다는 비판에 폐지된 바 있다. 곧 시행할 분양가상한제 역시 로또 시세 차익의 배분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10년 임대 갈등은 현재로서는 뾰족한 해법을 도출하기 어려워 보인다. 국회에는 입주민 민원을 반영한 의원 입법이 여럿 올라와 있다. 하지만 국회 통과 여부가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소급 입법이라 또 다른 논란을 부를 소지가 많다.
그렇다면 10년 임대는 실패한 주택정책인가. 서민·중산층의 꿈인 내 집 마련으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데 이만한 것이 없다. 10년 임대는 영구·국민 임대와 달리 주택 구매력이 있는 소득 5·6분위 중위계층을 대상으로 삼았다. 임대주택은 시대변화에 맞게 다양한 유형이 개발돼야 한다. 관건은 공공성과 사업성의 균형점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다. 애초부터 개발이익을 공유할 정교한 장치를 마련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예컨대 시세차익을 사업자와 입주자가 나누는 이익공유형이나 확정 분양가 방식이었다면 갈등 유발을 그나마 최소화했을 것이다. 성가시다고 해서 폐지할 것인지 의문이다. /글·사진=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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