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줄기에서 소백산맥이 갈라져 나오는 곳에 자리 잡은 경북 봉화군. 서울 두 배만 한 땅의 8할 이상이 산지로 돼 있어 봉화에서 풀 내음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시니 호흡이 절로 맑아지는 듯하다.
차를 타고 첩첩산중 봉화군 춘양면 춘양로로 들어가다 보니 서벽리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나온다. 땅 위로는 백두산호랑이와 백두대간의 다채로운 식물이 서식하고 땅 밑으로는 전 세계 씨앗 종자가 숨어 있는 이곳은 국제식물원보존연맹 기준 아시아 최대 규모의 수목원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식물원이다. 신창호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전시교육사업부장은 “백두대간에 더불어 전 세계 식물을 보존하는 것이 목표”라고 남다른 규모의 수목원이 설립된 취지를 설명했다. 구상나무 한 종을 예로 들더라도 자생 군락지에서 20m 간격으로 총 20개의 개체를 정해 보전해야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넓은 부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5월 개관한 이곳은 5,179㏊ 부지에 2,957종의 식물 400만본이 식재돼 있다.
수목원을 둘러보다 오전10시가 다가오자 신 부장이 갑자기 발길을 서두른다. 수목원의 명물인 백두산호랑이가 동물사에서 나와 ‘호랑이 숲’에서 영역 순찰을 하며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때라는 것이다. 축구장 7개 크기의 ‘호랑이 숲’에는 암컷 ‘한청이’와 수컷 ‘우리’가 방사돼 있다. 차량으로 서둘러 호랑이 숲에 당도하자 마침 한청이와 우리가 순찰을 마친 뒤 물웅덩이에서 반신욕을 즐기고 있었다. 반신욕이 끝나자 기력이 도는지 서로 잡기 놀이를 하듯 큰 걸음으로 방사장을 뛰어다녔다.
수목원은 규모만 큰 것이 아니다. 한반도에 자생하는 다양한 희귀식물들을 옮겨 담은 이곳은 마치 보석함과도 같다. 전시공간은 206㏊로 전체면적에 비하면 작아 보이지만 27개 전시실을 모두 둘러보는 데에만 반나절 이상이 소요된다. 그중에서도 크고 작은 바위로 조성된 암석원은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다. 개마고원에 자생하는 백두산 떡쑥 등 평소 보기 힘든 고산식물이 식재된 이곳은 봄에는 돌단풍, 여름에는 한라개승마, 가을에는 구절초, 겨울에는 겨우살이 등이 고개를 들며 사계절 내내 다채로운 모습을 자랑한다.
암석원을 둘러보고 이동하다가 문득 이곳에 ‘시드 볼트(Seed Vault)’, 즉 종자 영구보존시설이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전 세계에서도 노르웨이와 한국 두 곳에만 있다는 시드 볼트는 지구상에서 식물종이 사라지는 데 대비해 만든 이른바 현대판 ‘노아의 방주’다. 얼마나 많은 씨앗이 이곳에 보관되고 있는지 묻자 신 부장은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띠며 “다른 일정이 없다면 시드 볼트는 꼭 보고 가라”고 권했다. 일반에 공개되는 장소는 아니지만 수목원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인 만큼 특별히 출입을 허가해주겠다는 것이다.
백두대간야생초화원을 지나 만난 시드 볼트는 은색 타원형의 자태를 뽐냈다. 3,150종 5만880점의 씨앗이 잠들어 있다고 하기에는 소박한 크기로 보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배기화 종자보전연구실 실장은 “보이는 건물은 시드 볼트 입구”라면서 “지하 46m를 내려가야 씨앗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승강기를 이용해 땅 밑으로 내려가니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두꺼운 패딩점퍼를 입고 1℃ 방에서 적응 시간을 가진 뒤에야 영하 20℃의 종자 보관소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두께 60㎝의 강화 콘크리트로 건설된 지하창고는 진도 6.9 지진까지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다고 한다. 배 실장은 “야생식물이 기상이변·산업화·자연재해 등으로 멸종할 것을 대비해 종자를 보관하고 있다”며 “유사한 시설인 시드 뱅크는 필요에 따라 종자를 다시 꺼내기도 하지만, 이곳은 멸종 등의 이유가 아니면 절대 반출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200만점 이상 저장 가능한 이 시드 볼트의 목표는 미래 세대를 위해 2030년까지 전 세계 식물 종자 1만여종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한다.
/글(봉화)=한민구기자 1min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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