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일 서울지방경찰청 중요미제사건수사팀장은 지난 2017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2년여의 수사 끝에 2002년 발생한 구로 호프집 여주인 살해사건의 범인을 15년 만에 검거했기 때문이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당시 수사기록을 바탕으로 목격자와 관계자들을 수시로 만나고 용의자를 계속 추적하면서 단서를 잡는 데 주력했다.
결정적 단서는 사건 현장 구석에 남은 깨진 맥주병에서 발견된 오른손 엄지손가락 쪽지문(조각지문)이었다. 사건 발생 당시에는 쪽지문을 분석할 기술이 부족했지만 이후 도입된 지문자동검색시스템(AFIS·아피스)으로 용의자인 A씨를 포함해 몇 명의 남성을 추려냈다. 이어 현장에서 발견된 족적(발자국)이 뒷굽이 둥근 형태의 ‘키높이 구두’라는 분석 자료를 추가로 적용, 신장이 165㎝ 정도인 A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처음에는 부인으로 일관하던 A씨는 수사팀이 하나하나 증거를 들이대자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범행을 실토했다. 공소시효 만료를 5개월 앞두고 극적으로 장기미제사건의 범인을 잡은 것이다. 정 팀장은 “범인의 족적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서울역 구두상들까지 만나 탐문했다”며 “장기미제수사는 성과가 나오는 데 오래 걸리지만 범인을 검거하면 그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영원히 미제로 남을 것 같았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장기미제사건 전담수사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2015년 ‘태완이법’으로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완전히 폐지돼 범행 시점과 관계없이 수사가 가능해지면서 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피해자 유족들의 마지막 희망인 장기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은 어떻게 운영되고 수사를 진행하는지 들여다봤다.
각 지방청 별로 2~11명까지 구성
피해자 가족·목격자·당시 수사관…
하루 대부분 사람 만나는데 할애
◇만나고 추적하고…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수사관=경찰청에 따르면 현재 전국 17개 모든 지방경찰청에 장기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이 구성돼 있다. 인원은 서울 11명을 비롯해 경기남부 7명, 부산 6명이고 나머지는 2~5명 수준이다. 사건 발생 후 5년간 피의자를 검거하지 못한 살인사건 등을 각 지방청의 중요미제사건 수사팀이 인계받아 집중 수사를 벌이고 있다.
장기미제사건 수사팀은 살인·강도·강간 등 강력사건 분야에서 오랜 경험이 있는 수사관들을 위주로 구성된다. 추적 분야 전문 수사관, 컴퓨터 포렌식 전문가, 미제사건 발생 당시 수사팀에 있었던 수사관들도 합류해 팀을 이룬다. 수사관들은 사람들을 만나는 데 하루 대부분을 할애한다. 아침에 출근한 뒤 각자 어제 어떤 것을 확인했고 오늘 누구를 만나는지 단체대화방에 공유한다. 당시 미제사건을 담당했던 수사 형사들도 만나 협업도 한다.
서울청 미제사건 수사팀 관계자는 “수사를 위해 하루에 강남·송파·중랑·영등포 등 서울 시내 여섯 군데를 돌아다닌 적도 있다”며 “피해자, 피해자 가족, 목격자 등 참고인, 당시 수사관, 수사에 참여했던 법의학자까지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최대한 접촉하고 만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각자 어떤 실마리를 잡았는지 공유하고 당시 수사기록·증거들을 재확인하는 절차 등을 거치면서 용의자 범위를 좁혀나간다. 필요하면 용의자를 몰래 추적하기도 한다. 한 수사관은 “DNA를 확보하기 위해 용의자를 이틀 동안 쫓아다니며 담배꽁초를 주우러 다닌 적도 있다”고 말했다.
법최면·음성분석 등 첨단 기법에
프로파일링으로 단서잡기 총력전
부족한 인력·전문성 강화는 과제
◇‘최면수사부터 음성분석, 프로파일링까지’ 첨단 수사기법 총동원=장기미제사건을 해결하는 데 첨단 과학수사도 필수다. 사건 발생 당시에는 기술이나 장비가 부족해 범인을 잡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지만 현재는 DNA나 영상 분석은 물론 음성 분석과 법최면 수사까지 동원해 용의자를 끝까지 추적한 뒤 범행을 밝혀내고 있다.
최근 경찰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한 이춘재에 대한 목격자들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법최면 전문가를 투입해 최면 수사를 실시했다. 법최면 수사는 조사자에게 최면을 걸어 무의식에 남아 있는 특정 기억을 끄집어내는 조사 방법이다. 화성살인 7차 사건 때 용의자와 마주쳐 수배전단 작성에 참여했던 버스 안내양 등이 최면 수사를 받았다. 음성분석 활용도 늘고 있는 추세다. 범인 목소리가 담긴 녹음파일을 음성분석 전문회사에 맡겨 신상정보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1991년 발생한 ‘압구정동 고(故) 이형호 유괴살해사건’의 경우 단서가 범인 목소리밖에 없어 음성분석을 통해 수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프로파일러들의 활약이 돋보인 사건도 있었다. 2002년 4월 충남 아산시에서 차를 타고 귀가하던 노래방 여주인이 납치 후 살해된 채 아산 갱티고개에서 발견된 ‘아산 갱티고개 살인사건’이 대표적이다. 초기 수사 당시 범인이 마스크 등으로 얼굴을 가려 신원을 특정할 수 없어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15년이 흐른 2017년 1월 5개 지방청 소속 프로파일러 8명으로 합동 미제사건 수사팀이 꾸려졌다. 수사팀은 수사기록 4,300쪽을 해체해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구성한 프로파일링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에 따라 운전과 동시에 피해자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최소 2명 이상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공범의 존재를 예상한 경찰은 사건 당시 참고인 조사를 받았던 B씨에 주목했다. 경찰의 집중 추궁 끝에 B씨는 결국 직장 선후배 사이였던 C씨와 공동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인원 보강하고 과학수사 지원 뒷받침돼야=장기미제수사팀이 이처럼 일선에서 열심히 수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서울청은 11명으로 그나마 많은 편이지만 광주·대전·강원·충북·제주청 등은 3명에 불과하고 충남청은 2명밖에 없다. 미제사건을 해결하려면 당시 사건 기록을 일일이 보며 빠진 부분이 없는지 꼼꼼히 살피고 발품을 팔아 다방면으로 뛰어야 하는데 2~3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폐지돼 장기미제사건 수사에 대한 법적인 근거는 마련됐지만 수사 인원 등 인프라 측면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며 “경찰 내부에서 인원을 재배치해 어떻게 하면 장기미제수사팀을 보강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인원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사건이 해결되는 것이 아닌 만큼 노련한 수사관, 의지를 가진 형사들을 잘 선별해 수사팀에 보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과학수사에 대한 지원과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학수사가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택수 계명대 경찰법학과 교수는 “DNA 분석 등 매년 감정물 처리 건수는 급증하고 있는 데 반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인력 규모는 외국에 비해 여전히 적은 편”이라며 “또 지방청을 중심으로 물리·화학·생물·기계 등을 전공하고 관련 자격증을 취득한 이들을 특채해 과학수사 요원들의 전문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동훈기자 hoon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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