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가 좋아 그랬던 것인지 성북동을 중심으로 한 성북구 일대에는 유독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살았다. 1939년 2월 창간된 ‘문장(文章)’지의 주간을 맡은 소설가 이태준과 표지그림을 일임한 문인화가 근원 김용준은 성북동 지척에 살았다. 김용준은 직접 매화 그림으로 문장지 표지화를 그렸고, 절친한 화가인 수화 김환기에게 1939년 6월호를 의뢰하기도 했다. 이후 김환기는 1955년 1월 ‘현대문학’ 창간호 표지도 맡아 당시 최신 경향인 추상적 화풍의 산과 하늘, 사슴과 학 등을 선보였다.
김용준과 김환기는 남다른 인연으로 ‘같은 집’에 살았다. 정확하게는 김용준이 1934년부터 1944년까지 성북동 274-1번지에 살았다. 이태준은 늙은 감나무가 많다 하여 이 곳에 ‘노시산방’이란 별칭을 붙였다. 이 집을 넘겨받은 김환기는 김향안과의 이름에서 한 자씩을 따 ‘수향산방’이라 짓고 신접살림을 차렸다. 김용준이 1944년에 그린 수묵화 ‘수향산방 전경’에는 유난히 키가 큰 김환기와 아담한 김향안이 등장한다.
성북구 예술인들의 교류 흔적을 통해 문화사와 지역사를 두루 아우르는 성북구립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전 ‘존재와 공간’이 11월24일까지 열린다. 정릉동·삼선동·동소문동·동선동까지 총 57명의 굵직한 예술가들의 대표작과 사진·친필자료 등을 전시했다.
층층이 내려앉은 석양 그림으로 유명한 윤중식이 성북동 자택에서 그린 ‘성북동 풍경’은 이번에 최초 공개된 작품이다. 예술가들이 왜 이곳을 사랑했는지를 그 풍경이 말해준다. 삼선동에서 20년 가까이 살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조각가 김종영은 은은한 색조의 수채화로 ‘삼선교 풍경’을 쓰다듬었다.
청록파 시인들이 모여앉아 ‘청록집’ 발간을 상의한 곳은 조지훈의 성북동 집 ‘방우산장’이었다. 이 책의 장정을 해 주고 푸른 사슴이 내달리는 표지화를 그려준 이 또한 김용준이었다. ‘문학사상’ 표지에 조지훈의 초상화를 그린 이는 변종하 화백으로, 그가 1980년 성북동에 지은 집과 아틀리에는 지금 ‘변종하미술관’이 됐다.
소설가 박경리는 1950년대부터 30년 가량 성북구에 살면서 ‘토지’ 집필을 시작했다. 그 집 가까이 살던 박고석은 산을 즐겨 그렸고, 절친 이중섭은 구상의 시집 표지를 그렸다. 당시 이중섭은 입원했던 병원을 나와 친구 한묵의 정릉동 하숙집에 같이 살았다. 핍진하던 시절의 얘기다.
전시에는 1980년까지 성북구 일대에 살던 박완서의 ‘도시의 흉년’ 육필원고가 나왔다. 추상화가 이두식이 그린 이 단행본의 표지도 눈길을 끈다. 정릉과 하월곡동에 살던 소설가 박화성이 이끈 한국여류문학인회가 창간한 ‘여류문학’의 표지는 모두 천경자가 도맡았다.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는 누가 봐도 천경자다. 구상조각의 거장 권진규는 1973년 5월 3일 개막한 고려대 미술관에서의 사진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동선동 아틀리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권진규가 지인인 박혜일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유서 대신 남긴 편지는 전시장을 찾는 이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최후에 만난 지인들 중 가장 희망적인 분이었습니다. 인생은 공(空), 파멸, 오후 6시 거사”.
작곡가 금수현은 직접 설계한 정릉동 집에서 금난새·금노상 등의 음악 거장 자제들을 길러냈다. 미술을 전공한 아들 금누리는 아버지 금수현의 데드마스크를 직접 제작해 이번 전시에 내보였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썼고 이제는 영화감독 봉준호의 외할아버지로도 유명세를 탄 박태원은 인세로 성북동 집을 받아 이곳에서 살았다. 작곡가 윤이상은 아내가 혼수로 해 온 피아노를 팔아 성북동 한옥으로 이사했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이 창간한 ‘문학사상’의 1972년 10월 창간호에는 화가 구본웅이 그린 시인 이상의 초상이 표지로 실렸는데 윤이상이 작곡한 오페라 ‘심청’에 관한 내용이 그 안에 등장한다.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장한 윤이상의 ‘심청’은 독일 뮌헨올림픽 때 바이에른음악제에서 초연됐고, 전시장에서는 독일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만난 젊은 백남준과 함께 찍은 사진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시인 한용운, 건축가 김중업, 동양화가 서세옥 등 전시된 작품의 작가 모두가 빛나는 별들이다. 김경민 성북구립미술관 학예사는 “근현대 예술가들의 작품 세계 이면에 깃든 성북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반추하며 사라져가는 예술인들의 공간·장소 발굴의 가치를 되새긴 전시”라고 소개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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