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와중에 일왕 즉위식에 왜 가나. 그래도 가야지. 파격적으로 대통령이 가는 건 어떨까. 아니, 싸움 중인데 대통령이 어떻게 가. 전례에 따라 총리가 가는 걸로 하자. 그런데 가서 홀대라도 받으면 어떻게 해. 설마 정부 대표 축하 사절에게 그러겠어. 그건 그렇고 천황이라 부르는 건 맞나. 일왕 아닌가. 음, 외교 공식 용어는 천황이니까….
출발 전부터 많은 논란과 우려, 관측과 기대가 교차했던 이낙연 국무총리의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 참석 계기 일본 방문이 지난주에 있었습니다.
짧지만 길게, 가깝지만 멀게 느껴졌던 도쿄에서의 2박 3일이었습니다. 관심이 워낙 큰데다 이 총리가 매일 소화해야 할 일정이 많았던 까닭입니다.
원만하지 못한 한일 관계…피해는
물론 가장 중요한 일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의 회담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해야 했고, 한일 양국의 첨예한 외교적 대립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려야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외 일정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총리 동선이 꽤 여럿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총리의 게이오대 방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이 총리는 학부생들과 마주 앉았습니다. 일본 청년들에게 한국의 입장을 전했고, 현재의 한일 갈등에 대한 일본 청년들의 생각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곳에서 이 총리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가장 아프게 생각하는 건 청년들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겁니다. 어른들이 청년들의 시간과 마음을 뺏고 있는 것이니까요.”
또 이 총리는 “아버지 세대가 역사로부터의 상처를 갖고 양국관계를 바라봤다면 (청년들은)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으면서 상대를 보고 미래를 구축하게 하는 게 어른들이 할 일”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이는 일본 청년들에게만 전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세대 한국 젊은이들에게도 보내는 미안함이었습니다. ‘상처를 주는 어른’ 역시 외교 관계에 책임 있는 양국의 모든 어른을 일컫는 것이었습니다.
글로벌 시대, 어른 싸움에 등 터지는 청년들
이 총리는 “양국 청년들이 미래의 양국관계를 크게 보는 노력을 해달라”며 “그렇게 되도록 도와드리는 일이 우리 지도자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저도 그 책임을 완수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학교 측에서는 이 총리의 방문을 행사 직전에야 외부에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행여 극우 세력들이 학교로 찾아와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까 우려한 것이죠.
하지만 오히려 학생들은 한국으로 유학 가고 싶다는 희망,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다는 개인적 취향 등을 편하게 이 총리에게 전했습니다.
이 총리는 일본 방문 기간 동안 유력 경제인들도 만났습니다. 그들 중에는 기업의 이윤 환원 차원에서 한일 교류를 오랫동안 후원해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26년째 한일 고교생 교류를 지원해왔다는 한 경제인은 서울에서 열린 학생 교류 캠프에 참가했던 일본 학생의 감상문을 소개했습니다. 한국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서울에서 사흘을 보내는 동안 평생 갈 친구를 얻었고, 앞으로 한국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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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청년들의 에너지를 높이 평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 직원 채용을 중단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경제인은 오랫동안 지원했던 한일 소년 교류가 올해 중단됐다며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소년 교류 중단에 대해 “어른들 책임”이라며 “이 총리도 어른이니 해결과 재발 방지에 노력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日서도 커지는 “이대론 안돼” 목소리
24일 이 총리와 아베 총리의 회담 후 일부 일본 언론들은 아베 총리가 이 총리가 전한 문 대통령 친서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고 보도했습니다. 회담 중에 아베 총리가 국제법 위반만 거듭 강조했다고 전한 보도도 있었습니다. 국내 일각에서도 아베 총리가 친서를 열어보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과거 야마구치 나쓰오 일본 공명당 대표가 아베 총리의 친서를 들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했을 때도, 현장에서 친서를 열어서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아베 총리는 이 총리와 회담 하루 전인 23일 문 대통령이 지난 14일 보냈던 태풍 위로전에 사의를 담은 답신 전문을 보냈습니다. 아베 총리는 답신 전문에서 “문 대통령의 격려 메시지가 피해를 입은 일본 국민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며 사의를 표한 것으로 전했습니다.
한일 갈등이 심하긴 하나 양국 관계가 최소한의 외교적 예의마저 모두 다 벗어던졌을 정도로 ‘막장’은 아니니까요.
일본 국민들도 한국 총리의 방일에 마냥 냉담하거나 적대적이었던 건 아닙니다.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을 전후해 전 세계 170여 개국에서 400여 명의 외빈이 일본을 찾은 가운데 이 총리는 현지에서 꽤 화제의 인물이었습니다.
지난 26일 TV 아사히의 주간 뉴스 분석 프로그램에서는 이 총리가 한 주간 뉴스 중 가장 궁금한 인물 1위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이낙연이라는 개인이 아닌 한국이라는 이웃나라에 대한 관심이라 생각합니다.
“외교의 요체는 커뮤니케이션”
물론 아직 많이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를 놓고 양국의 입장 차가 너무 큽니다. 아베 총리는 이 총리에게 “개인적으로 일본을 잘 아는 이 총리가 와줘서 고맙다”면서도 “한국이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다”면서 ‘한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국가’ 프레임을 이번에도 거두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절대로 배상에 관여할 수 없으니 한국이 알아서 해결하란 ‘불통’의 고집이자 압박인 겁니다.
현 상황에 대해 외교 고위 당국자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피 흘리지 말고 살을 베어내란 거나 마찬가지”라고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렇지만 또 양자 간에 아무런 접촉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고위 당국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 너무 많은 해법이 서로 제안되고 있어 오히려 힘들다”며 “그래서 교통정리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외교의 요체는 커뮤니케이션”이라며 1997년 ‘하노이 대화’를 예로 들었습니다. 이는 1961년부터 7년 동안 미국의 국방장관으로서 베트남 전쟁을 지휘했던 로버트 맥나마라가 1997년 하노이를 찾아 베트남 측 전쟁 관여자들과 허심탄회하게 회고와 반성의 시간을 가졌던 일을 말합니다.
당시 미국과 베트남 양측은 4일 동안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에 모여 집중 대화를 통해 오해와 서운함, 전쟁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데 대한 반성 등을 다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양국은 미래지향적 관계에 더 큰 방점을 찍었습니다.
외교 당국자는 한일 간에도 그런 대화가 필요하단 뜻에서 하노이 대화를 언급했을 겁니다. 이제 한일 어른들의 성숙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과거와 현재만을 생각할 게 아니라 미래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에 상처를 줘서 안된다’‘청년들의 시간과 기회를 빼앗아선 안된다’는 자세를 가진다면 조금 더 빠르게 어둠의 터널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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