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끝납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지난 7일 반미집회 참가자들이 서울 종로구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던 탈북민 천막 바로 앞까지 다가와 ‘미군철수’ 등의 구호를 외치자 양측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반미 구호가 귀에 거슬린 듯 탈북민이 격앙된 반응을 보이자 인근에서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서상훈 종로경찰서 경위는 마치 의사가 환자를 대하듯 달랬다. 서 경위는 집회현장에서 대화를 통해 평소 시위자들과 친분과 신뢰를 쌓아가며 협조를 이끌어내는 대화경찰이다. 오전10시 반미단체의 집회·행진과 함께 업무가 시작된 서 경위는 곳곳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을 방지했다.
이날 반미단체는 서울 종로구 주한 미국대사관 앞 집회·행진을 하며 반대 성향의 집회 참가자들과 총 세 차례 마찰을 빚을 뻔했다. 미국대사관 근처 교보문고 앞에는 탈북민단체가 있었고, 건너편 세종문화회관에는 보수 성향의 ‘순국결사대’가, 또 정부청사 앞에는 탈북민과 보수단체가 천막농성을 하고 있었다. 반미단체의 행진이 시작되기 전부터 서 경위는 반대 진영이 위치한 곳을 찾아 협조를 구했다. 집회·시위자들 중 서 경위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보일 정도로 서로 친숙한 모습이었다. 한 보수단체 회원은 서 경위에 대해 “본인의 소속과 이름을 친절히 말해주고 편안히 상대해준다”며 “일반 경찰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고 말했다.
대화경찰관제도는 지난해 8월 시범운영 후 10월부터 확대 시행됐다. 별도 식별표식을 부착한 대화경찰관은 참가자와 주최자, 일반 시민들이 집회와 관련해 경찰의 조치와 도움이 필요할 경우 쉽게 찾을 수 있다. 물론 집회마다 경비경찰인력이 배치되지만, 그와 별개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대화경찰관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집회 참가자와 경비경찰의 가교 역할을 수행한다. 대화경찰은 현재 서울 400여명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1,400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다.
◇집회 참가자와 소통하며 불법폭력행위 최소화=대화경찰제도는 스웨덴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스웨덴은 2001년 유럽연합(EU) 정상회의 반대시위 당시 경찰 발포로 시위 참가자들이 사망해 논란이 일자 물리적 진압보다 사전에 충돌을 막을 협상력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대화경찰제를 도입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동안 일선 경찰서 정보관들이 집회현장 관리를 맡아왔다. 이들 정보관은 집회·시위 관련 정보수집과 평화적 관리 업무를 수행하지만, 일각에서는 민간인을 사찰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정보관들이 집회·시위현장에서 현장을 통제하고 참가자들의 폭력행위를 억제하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평화적인 집회·시위를 유도하려면 참가자들과 소통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고 보고 대화경찰제를 도입한 것이다.
이에 따라 기존 정보관들 중 일부가 차출돼 교육을 받고 대화경찰로 활동하며 경비 업무를 맡는 경찰기동대에도 ‘대화경찰팀’이 꾸려졌다. 스웨덴 대화경찰이 폭력집회 저지를 위한 협상에 초점을 뒀다면 ‘한국형 대화경찰’은 집회 참가자들이 안전하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경찰 관계자는 “집회현장 인근 공용 개방화장실을 안내하는 것이 주요 업무일 정도”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집회·시위가 크게 늘었다. 지난해 열린 집회·시위는 6만8,315건으로 전년보다 58% 증가했다. 반면 불법폭력시위는 12건으로 2017년과 같았다. 2016년 촛불집회 이후부터 평화시위문화가 자리 잡아가고 있지만 불법폭력집회가 발생할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그만큼 대화경찰의 역할이 커지고 수요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해 8월15일부터 올 10월 말까지 대화경찰이 집회현장에 투입된 경우는 서울에서만 2,685회, 누적 기준 9,159명에 이를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올해 상반기 노조의 과격집회와 10월 보수단체의 대규모 집회로 집회현장에서 연행된 인원은 많을 수 있어도 폭력집회 건수 자체는 줄어드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절반의 성공 평가 속 대규모 집회에서는 한계 지적도=대화경찰제를 본격 도입한 지 1년여가 지나면서 경찰 안팎에서는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주말이면 서울 시내에서 상반된 정치적 입장을 지닌 단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집회를 열고 있어 폭력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지만, 대화경찰이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충돌을 막는 임무를 톡톡히 해내고 있다.
대화경찰제가 정착될 경우 장기적으로 집회·시위현장에서 경찰력을 필요한 범위 내에서 최소 규모로 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의무경찰제 폐지로 기동대를 비롯해 경비인력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대화경찰이 제 몫을 할 경우 집회·시위현장에서 수십~수백명의 병력이 담당했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대규모 집회에서 대화경찰의 역할이 제한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경찰은 소규모 집회의 경우 대화경찰관 1~2명을 투입해 현장을 조율할 수 있도록 하고, 수천~수만명이 모이는 집회에서는 경찰기동대 대화경찰팀을 투입한다. 4월 민주노총의 국회 앞 집회와 10월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의 집회 등 대규모 집회에 대화경찰관들이 투입됐음에도 각각 수십명이 집시법 위반 및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현장에서 연행됐다. 지난달 30일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민중대회 참가자들이 청와대 앞길 행진을 하며 수십개의 횃불을 든 것처럼 예상치 못한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처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경찰 관계자는 “대화경찰은 사전에 불법을 방지하는 역할일 뿐 불법행위가 발생하는 순간부터는 경비경찰의 몫”이라고 말했다.
경찰이 대화경찰제 도입을 통해 집회현장 관리 방식을 개선하고 있지만 사회갈등이 첨예화할 경우 지금까지의 노력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 프랑스의 노란조끼 시위나 홍콩 민주화 시위처럼 과격·폭력시위가 발생할 경우 대화경찰도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올 하반기 들어 주말마다 대규모 집회가 열리면서 대화경찰은 물론 경찰력을 총동원해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마찰을 줄이는 상황”이라며 “서로 입장이 다르더라도 대화경찰처럼 대화하면서 갈등을 줄여나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손구민기자 kmsoh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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