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 23
prev
next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1년 반 만에 청와대 춘추관을 다시 찾았다. 지난해 5월 판문점 2차 남북정상회담 결과 발표 이후로 처음이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을 총리로 발탁하기 위해 직접 나서 최대의 예우를 갖춘 것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개각 때처럼 차기 총리를 직접 지명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저는 입법부 수장을 지내신 분을 국무총리로 모시는 데 주저함이 있었다”면서도 “그러나 갈등과 분열의 정치가 극심한 이 시기에 야당을 존중하고 협치하면서 국민의 통합과 화합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입법부의 전 수장을 행정부 2인자로 발탁한 것에 대해 정치권과 국민들에게 대통령으로서 양해를 구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정세균 후보자는 온화한 인품으로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며 항상 경청의 정치를 펼쳐왔다”며 임기 후반기 ‘정치적 중재자’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인사 발표 이후 참모들에게는 “국회의장으로서 여야를 운영해왔던 경험, 그리고 협치의 능력, 그런 것들을 높이 평가했고 그래서 비상한 각오로 모셨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른바 삼권분립 훼손 논란과 관련해 “총리 후보자께서 국민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그렇게 밝힌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문 대통령의 경쟁자이자 동반자였던 정 후보자는 실제로 여야의 신망을 얻고 있으며, 정치적 위상에 걸맞은 ‘책임 총리’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 역시 정 후보자에게 내각 인사권을 포함해 상당한 권한을 이양할 가능성이 크다. 정 후보자 발탁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그가 기업인 출신이며,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경제통이라는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여당을 떠나 산업부 장관을 맡았던 정 후보자는 지독한 일벌레로 관료사회에서도 소문이 난 인물이다. 청와대는 일찌감치 ‘경제 총리’에 방점을 찍고 차기 국무총리를 물색해왔다.
문 대통령은 “정세균 후보자는 우선, 경제를 잘 아는 분이다. 성공한 실물 경제인 출신이며, 참여정부 산업부 장관으로 수출 3,000억달러 시대를 열었다. 또한 6선의 국회의원으로 당 대표와 국회의장을 역임한, 풍부한 경륜과 정치력을 갖춘 분”이라고 밝혔다. 이는 문 대통령 향후 경제정책 설계와 집행에 있어 상당 부분을 정 후보자에게 힘을 실어줄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정부 하반기의 과제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통합과 화합으로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 국민들께서 변화를 체감하실 수 있도록 민생과 경제에서 성과를 이뤄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후보자 발탁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가 호남 출신 정치인이라는 점이다. 이낙연 총리에 이어 또다시 ‘호남 총리’를 발탁함으로써 문 대통령은 내년 총선에 대비해 지지층을 공고히 하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해석된다. 정 후보자는 정치권에 입문한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외곽조직이었던 ‘연청’의 중앙회장을 지냈다. 종로로 지역구를 옮기기 전에는 전북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그런 만큼 정 후보자의 발탁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짙은 호남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호남 출신 경제 총리’ 발탁으로 지지층을 잡고, 국정 운영의 안정성을 도모하는 인사로 해석된다.
이와 동시에 집권 후반기에 흔들리기 쉬운 관료사회를 다잡으려는 문 대통령의 의지가 이번 인사에 담긴 것으로 분석된다. 임기 후반기가 될수록 대통령의 레임덕이 찾아오고, 공직사회의 분위기는 흐트러질 수 있다. 여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관료사회가 무너지면 임기 후반기는 완전히 흔들린다”며 “교수 출신보다는 정치권과 세종 관가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정치인을 발탁해야 한다는 여권 내부의 공감대가 있었다”고 전했다.
청와대는 이날 정 후보자를 총리로 모시기 위해 우여곡절이 많았음을 토로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문재인 대통령이 오래 고심했고, 삼고초려에 해당하는 노력도 있었다”며 “참 고심하고 어렵게 모셨다”고 말했다. 정 후보자는 당초 종로 지역구 출마 의사를 강력히 피력했으나 청와대 고위관계자들은 물론 유력 총리 후보였던 김진표 더불어민주당 의원까지도 직접 정 전 의장을 만나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이날 떠나는 이 총리에 대한 깍듯한 인사도 잊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마지막까지도 이 총리의 유임을 고민했을 정도로 이 총리를 떠나 보내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이낙연 총리님이 내각을 떠나는 것이 저로서는 매우 아쉽지만,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신망을 받고 있는 만큼, 이제 자신의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놓아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 어느 자리에 서든 계속 나라와 국민을 위해 봉사해주시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여의도로 떠나는 이 총리의 역할에 대한 문 대통령의 애정과 기대가 담긴 발언이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이낙연 총리께서 자신의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놓아드리는 것이 도리다’라는 문 대통령의 발언에 답이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윤홍우기자 seoulbird@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