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이 감독한 안여(安輿·임금이 타는 가마)가 튼튼하지 못해 부서져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했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이 한 줄은 영화 ‘천문’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영화는 노비 출신이던 장영실이 어떻게 세종 때 20년 이상 관직에 머물면서 세종의 최측근이 됐는지, 둘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등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에 영화적 상상력이 보태져 따뜻한 판타지 동화 같은 사극으로 재탄생됐다. 특히 세종과 장영실의 신분을 뛰어넘은 우정과 서로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그동안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이상적인 관계로, 군신 관계의 선을 넘을 듯 넘지 않는 장영실로 인해 영화는 더욱 애틋하다. 장영실 역을 맡은 최민식(사진)은 이러한 톤을 절묘하게 만들어내 한국에서 가장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명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개봉을 앞두고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세종과 장영실은 홀딱 벗고, 계급장 떼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교감한 사이라는 게 이 작품의 핵심”이라며 “세종의 장영실에 대한 마음은 신하를 아끼는 것 이상의 감정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화는 장영실이 호조판서 이천의 눈에 들어 궐에 입성한 이후 세종과 만나고, 세종 또한 장영실의 재주를 알아보면서 꿈을 함께 이루는 동반자가 돼 수 많은 난관 속에서 천문 연구를 지속하는 과정을 그렸다. 최민식은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동반자였던 세종과 장영실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친밀한 사이였을 것이라고도 했다. “실록을 보면 세종이 침소에서 장영실과 가까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대목이 나와요. 임금의 침소에는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요즘 같으면 하이파이브를 하며 격의 없이 지낸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싶었죠.”
밤하늘을 바라보며 세종은 임금으로서의 고뇌, 장영실도 나름의 고뇌를 조심스럽게 털어놓는 장면은 이 작품의 명장면 중 하나다. 최민식 역시 이를 작품의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하는 장면으로 꼽았다. 그는 “금정전 앞에서 별을 볼 때 세종이 드러누우면서 장영실의 관모를 벗기고 같이 눕자고 한다”며 “임금과 신하가 같이 눕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데 둘은 그렇게 한다. 같은 꿈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장면에서 세종은 장영실에게 “늘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유일하게 올려다보는 순간은 하늘의 별을 볼 때”라고 하고, 장영실은 “저는 늘 눈을 아래로 내려 깔고 있어야 하고 올려다보면 혼쭐이 나는데 하늘은 올려다봐도 아무도 뭐라는 사람이 없다”고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털어놓는다. 이 장면에서 아름다운 별들이 빛나는 밤하늘은 고된 일상을 마친 두 사람이 편히 누워 잠도 자고 꿈도 꿀 수 있는 이불처럼 따뜻하게 덮어주는 듯한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천문’은 세종과 장영실의 ‘브로맨스’물이기도 하지만 당대 정치 현실을 절묘하고 유려하게 끼워 넣은 우아한 정치 사극이기도 하다. 천문 제작, 한글 창제, 인재 등용을 둘러싼 사대부들의 정치대결과 전략, 대의명분 등은 사극의 맛을 살려낸 것이다. 특히 왕이 세 번 바뀌어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킨 영의정(신구)는 정치와 정치력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다. 그는 세종이 장영실에게 벼슬을 내릴 때 반대하는 신하들과 임금 사이에서 절묘한 대안을 제시하는가 하면, 사대부들의 입지를 위해 장영실을 두고 임금과 협상을 하기도 한다. 노련하면서도 지혜롭고 때로는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놓치지 않는 ‘정치인’ 영의정 역시 신구가 아니라면 표현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영의정 역에 신구를 추천한 것은 최민식과 한석규라고 한다. “그분 정도의 아우라, 에너지, 존재감을 갖고 계신 어르신이 영의정 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 10단 아닌가요. 신구 선생님이 현장에 계시는 것만으로 중심이 꽉 잡히는 것 같았습니다.”
/연승기자 yeonvic@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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