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검찰개혁이 화두가 되고 있으나 국내에서는 판사들에 대한 신뢰도도 그리 높지 않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고 ‘전관예우’도 여전하다. 잔혹한 아동성범죄에 상식 이하의 판결이 내려지기도 한다. 판검사 모두 자기 식구의 범죄에 대해서는 솜방망이 대처로 어물쩍 넘어가기 일쑤다. 오죽했으면 일부에서 ‘인공지능(AI)에 맡겼으면 좋겠다’는 목소리가 나올까. AI가 관여하면 신속하고 공정한 판단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액재판(소송가액이 작은 민사재판)에 AI 판사를 도입하는 나라가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북유럽에 있는 정보기술(IT) 강소국 에스토니아다. 인구가 133만명에 불과해 얼핏 생각하면 법률분쟁이 그리 복잡할 것 같지 않은데 에스토니아는 왜 AI 판사를 도입하려는 것일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카이 헤르만드(47) 에스토니아 법무부 차관을 서울에서 만났다. 그는 최근 대법원 산하 사법정책연구원 등이 주최한 ‘AI와 법, 그리고 인간’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길에 서울법원종합청사에서 서울경제신문과 90분간 단독 인터뷰를 갖고 “내년 중 소액재판에 대해 AI 판결을 시험 실시하게 될 것이고 이후에는 AI가 판사의 예측을 돕는 툴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AI는 보조역할이라 제가 죽기 전에 AI가 형사사건이나 액수가 큰 민사사건 등에서 단독으로 판결을 내리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피력했다. 판사 출신인 그는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함께 판사의 공감·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소액재판에서 AI 판결을 언제 하는가.
△아직은 잘 모른다. 시간에 쫓겨 하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신뢰할 수 있는 단계를 밟을 것이다. 내년 중에는 시험 실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도입 배경은.
△7,000유로(약 910만원) 이하의 소액재판은 절차나 유형이 정형화돼 있고 (AI가 수집한 판례에 따라 판결해도) 법적 분쟁에 대한 우려가 별로 없어서다. 비용을 줄일 수 있고 판사는 좀 더 크고 중요한 사건에 집중할 수 있다.
-국민 빅데이터를 구축한 덕분에 가능하게 된 것인가.
△부분적으로 그렇다. 에스토니아는 ‘X로드(X-Road)’라는 전 국민 빅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했고 이를 통해 공공기관에서 빠르고 쉽게 정보에 접근하고 저장할 수 있다.
-X로드에 접근하려면 전자신분증이 있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볼 수 있나.
△물론이다. ‘472XXXXXXXX’로 돼 있는 이 주민등록번호의 4는 여성, 72는 1972년생이라는 뜻이다. 뒷면에는 전자서명이 있다. 그렇지만 이 전자신분증 자체에는 정보가 담겨 있지 않다. 공공기관에서 X로드에 제 주민등록번호를 넣으면 의사는 의료기록을 볼 수 있고 경찰은 범죄정보를 조회할 수 있다. 세금이나 부동산 정보 등 많은 게 담겨 있다. 물론 저는 X로드에 있는 제 정보를 다 들여다볼 수 있고 누가 제 정보를 들여다봤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전자투표를 도입해 선거에서 절반 이상이 컴퓨터로 투표할 정도다. 저는 초등생·고등학생·대학생 세 명의 자녀가 있는데 e스쿨링 시스템으로 부모가 자녀의 성적과 숙제를 볼 수 있고 결석계도 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서류 없이 온라인으로 행정처리를 한다고 해도 결혼과 이혼은 직접 오프라인으로 신고해야 하고 상속도 공증인에게 한 번은 가서 증명서를 받아야 한다.
-AI 판사 개발과 운용 과정에서 중요하게 보는 점과 알고리즘 공개 여부는.
△투명성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알고리즘은 완성되면 정부 소유라 공개해야 한다. 정부끼리 얘기하면 한국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한국 사법부의 정보기술(IT) 관계자를 초청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소액재판에서 AI 판결이 정착되면 그다음에는 큰 규모의 민사사건이나 형사사건 등으로 확대할 예정인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에스토니아 인구의 25%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데 AI로 에스토니아말을 러시아어나 영어로 자동번역하거나 음성을 인식해 글로 옮기는 것, 법률적 조언을 하는 것을 먼저 하려고 한다. 법무부 IT 하우스에서 개발하고 있는데 그 이후 AI의 역할은 해커톤(해커와 마라톤의 합성어로 사람들이 함께 프로젝트를 논의하는 것)을 통해 논의해야 한다.
-판사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AI 개발은 유효하지 않나.
△AI가 더 큰 민사사건이나 형사사건에서 판사의 예측을 돕고 보조하는 툴을 개발하는 것은 필요하다. 다만 AI가 도와줄 수 있으나 법률분쟁은 매우 복잡해 심지어 전문가라도 도움을 주기 힘들다. 법적 분쟁 사례 자체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지난 2017년 미국 위스콘신주에서는 판사가 AI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형사 피고인에게 중형을 선고한 적도 있고 IBM이 2016년 개발한 ‘로스’라는 AI 변호사는 로펌에서 파산 전문 변호사로서 초당 10억건이 넘는 법률문서를 분석하고 있는데.
△지식재산권에 관한 것은 AI가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를 따져 가치판단을 해야 하는 형사사건 등에까지 도입하는 것은 변수가 워낙 많아 무리가 아닌가 싶다.
-AI를 활용한 소송기록 분석과 쟁점 추출, 판례 분석, 비슷한 사건 판결 추천, 판결문 초고 제공, 법률분쟁 조언 등은 앞으로 가능해지지 않을까. 시기와 속도의 문제이지 AI가 고도로 발전하면 스스로 판단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데이터가 모두 올바르고 예측이 정확하더라도 판사가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의 올바르고 정의로운 기준에 맞춰 사건 판단이 이뤄지도록 염두에 둬야 한다. 신뢰는 사람 사이에 쌓이는 것이다. 열쇠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오렌 에치오니 미국 앨런인공지능연구소장 등은 AI가 고도로 발달하는 단계를 전제로 “판사 역할을 대신하는 AI의 등장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글쎄….
-판결은 사람만이 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다. 판결은 사람에게 남겨둬야 한다. 철학적인 얘기일 수 있지만 재판에서 핵심 이슈 가운데 하나는 판사는 들어줄 의무가 있다는 점이다. 최종 판단은 당사자의 이야기로부터 나오는 만큼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저는 지식재산권에 전문성이 있는 판사였는데 가장 어려웠던 게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왜 그랬는가’ 동정심을 갖고 보는 게 가장 어려웠다. AI는 이렇게 하기 힘들다.
-판사 출신이라 그런지 AI 판결에 대해 부정적인 듯하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AI가 판사의 권리를 가져가지 않을 것으로 본다.(웃음) AI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판사가 개개인의 사건이 사회 정의에 비춰 법률적으로 어떤 것을 적용받아야 하는지 면밀히 검토하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AI 알고리즘이 차별과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판정한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뜻인가.
△미국 (범죄자의 재범 가능성을 예측해 판사에게 구속 여부를 추천하는 알고리즘인) 컴퍼스(COMPAS)를 보면 그런 면이 있지 않나. (2016년 미국의 독립언론 ‘프로퍼블리카’는 컴퍼스가 알고리즘 문제로 흑인의 재범 가능성을 백인보다 2배 높다고 판단했다고 보도했다)
-소액재판에 AI 판결을 한다니까 국민의 반응은 어떤가.
△일부에서 우려하는 시각도 있지만 대체로 우호적이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어떤가.
△지속적으로 조사하는데 판사에 대해 법원 이용자의 80%가량이 만족한다고 대답했다. 몇 년 전에 65% 정도로 낮게 나와 판사나 커뮤니케이션 담당자가 판결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건이 복잡하고 법률용어도 어렵고 사람들도 그 조치를 잘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래도 설명하면 도움이 된다.
-판결문은 어디까지 공개하나.
△이혼 등 가사사건을 빼고는 판결문을 모두 공개한다. 주요 판결에 대해 판사의 피드백이 이뤄지는데다 변호사나 법률 전문가 등이 언론에 찬반 칼럼을 자유롭게 써 사회에서 균형 잡힌 토론이 이뤄지도록 한다. 사람들도 판결문을 많이 읽는다. 검찰 공소장은 처음에는 공개하지 않지만 판결문에 첨부한다.
-AI가 발달하고 개인정보 제약이 없는 중국은 올 초부터 ‘AI 가상판사’를 통한 형사소송 온라인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2017년 항저우를 시작으로 베이징·광저우 인터넷법원에서 사이버 거래나 지식재산권에 관해 온라인 판결을 한다. 중국과도 사법정보를 교환하나.
△흥미롭기는 하지만 아직 커넥션은 없다. /고광본선임기자 kbgo@sedaily.com
She is…
1995년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법대를 졸업한 뒤 1996년부터 탈린시법원과 에스토니아 특허청에서 법률 자문을 했다. 1999년부터 하르주군법원 판사(1심)를 하다 2012년 법무부 차관(법정책)으로 발탁됐다. 판사 시절 모교 법대에서 지식재산권으로 석사를, 지난해 민사소송법으로 박사를 땄다. 그는 “저는 대학 다닐 때 처음 컴퓨터를 접하고 외국도 나가봤는데 자녀들은 유치원 때 외국 문화를 접했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됐다”며 활짝 웃었다. ‘수도인 탈린의 올드타운을 가보니 너무 멋지더라’고 말하자 “한국은 매우 발달한 디지털 선진국이라고 들었는데 창덕궁에 가보고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며 맞장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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