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갑질을 합니까. 대기업일수록 더 조심하던데요.”
회사에서 수년간 공을 들여 개발한 소재 신기술을 대기업에 납품하기 직전에 있는 한 중소기업의 A 대표의 말이다. 대기업의 이른바 ‘갑질’은 없었지만 시장은 냉정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사실 A 대표는 그간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자신의 명의로 빚을 낸 것도 모자라 친척들의 재산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았다. 가족 부양은 부인의 돈벌이에 의존했다. 그래도 A 대표는 단 한 번도 직원에 대한 임금 체불은 없었다고 자부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열정을 바쳐 기술을 가까스로 개발했고 대기업에 납품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A 대표는 빚을 갚아야 했고 이때 납품 얘기를 하던 대기업에서 지분매각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로서는 숨통이 트이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지분을 매각했고 앞으로도 지분을 더 매각할 예정이다. 그 결과 이 회사는 조만간 대기업으로 대주주가 바뀐다. 여전히 A 대표는 당분간 회사를 경영하고 기술을 개발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해 보였다. 복기해보면 모두가 신사적이었고 모든 것이 공정했다. 그래도 그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A 대표는 신기술 개발에 인생 전부를 걸다시피 했다. 이제 그가 개발한 기술이 본격 상용화되면 회사 실적도 큰 폭으로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실의 대부분은 대기업이 가져갈 수밖에 없다. 대기업도 일종의 위험 감수를 했지만, 이 대표의 위험과 대기업의 위험 감수 수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벤처산업이 크기 위해서는 인수합병(M&A)이 더 활성화돼야 한다는 말이 많지만 현실에서는 안타까운 사연이 많다.
A 대표로서는 잠시 더 버틸 돈이 없는 게 한인 듯했다. 그의 사연을 들으면서 대기업과 한 중소기업 대표의 서로 다른 위험을 정부 등이 나서 조금이라도 부담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자에게 이런 사정을 털어놓던 A 대표의 낮은 목소리가 기억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 greenligh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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