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면적 23.9k㎡.
지난 20대 총선 기준 가장 넓은 지역구인 강원 홍천·철원·화천·양구·인제(5,965km²)와 비교하면 250분의 1 수준에 불과합니다.
주민등록 인구는 지난해 12월 말 기준 15만1,290명입니다. 하지만 주간 생활 인구는 13.3배 많은 200만 명에 달합니다.
조선 왕의 거처, 경복궁과 대한민국 대통령의 관저, 청와대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과거 권력과 현재 권력의 심장부가 세월을 거슬러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제1 동맹’ 미국의 주한 대사관과 전국 이정표의 기준이 되는 도로원표도 이곳에 있습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행정 서열 1위 자치구, ‘종로’입니다.
오는 4월 15일 21대 총선을 앞두고 이곳, 종로에 다시 정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늘 그랬듯이 다른 어떤 선거구보다도 큰 전국적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역시 ‘정치 1번지’입니다.
■역대 대통령 셋 배출한 전국 유일 선거구
흔히 종로를 이렇게 ‘정치 1번지’라고 부릅니다. 왜일까요.
종로는 조선 시대부터 정치·행정·외교의 중심이었습니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오갔습니다. 고관대작은 물론 여러 관청에서 실무를 보는 관리, 해외 사신들까지 이 길을 지나 다녔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 후에도 종로는 계속 정치의 중심이었습니다. 국가를 작동시킬 주요 기능과 시설이 종로에 밀집해 있었던 까닭입니다.
의정 사상 첫 선거인 1948년 5월 치러진 제헌(초대) 선거 당시 출마자 수만 봐도 종로라는 지역에 대한 정치적 관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종로는 갑·을 두 개 선거구였고, 이곳에 출사표를 던진 후보는 두 곳 합쳐 17명에 달했습니다.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면 선생이 제헌 선거 종로구 당선자 중 한 명입니다.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유명한 인물들이 종로에서 당선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후일 제4대 대통령이 되는 민주국민당의 윤보선 후보와 무소속의 김두한 후보가 종로를 발판 삼아 정치 인생을 본격화했습니다.
종로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단 후 후일 청와대로 향한 이는 윤보선 대통령뿐이 아닙니다. 15대 이명박 당선자, 15대 보궐 노무현 당선자는 각각 17대, 16대 대선에서 정치권력의 정점에 올랐습니다. 역대 대통령을 세 명이나 낸 지역구는 전국에 종로 한 곳뿐입니다.
■사상 첫 여성 당수도 종로 통해 국회 입성
종로는 대통령만 여럿 배출한 곳이 아닙니다. 한국 여성 정치사와도 인연이 닿아 있습니다.
일제 잔재를 몰아내고 나라의 기틀을 세워야 했던 광복 직후, 남녀 불문 힘을 모아야 했지만 팔을 걷고 나선 여자들에게 숱한 남자들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비아냥댔습니다. 정치판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암탉이 낳은 병아리가 저렇게 꼬꼬댁거린다. 언제 길러서 쓰냐”고 일갈했던 여걸이 있습니다. 5선의 박순천 의원입니다.
그녀 역시 의회 정치로 향하는 첫 관문으로 종로를 택했습니다. 제헌 선거에선 아쉽게 패했지만 1950년 두 번째 선거에선 당당히 당선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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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박순천 의원은 1963년 민주당 창당대회에서 총재로 선임됐습니다. 1965년 민정당과 민주당의 통합 정당인 민중당에서도 대표 최고위원으로 뽑혔습니다. 헌정 사상 첫 여성 당수가 된 겁니다. 당시 당 대변인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사석에선 ‘누님’이라 불렀단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렇듯 한국 여성 정치 개척자에게도 종로 승리는 정치 인생의 중요한 포인트였습니다.
■먼저 손 든 이낙연, 고심하는 황교안
결국 종로는 정치인으로서 대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번은 출마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게 되는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현재 여권 차기 대선 1위 주자 이낙연 국무총리와 야권 1위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움직임에 자연스레 관심이 쏠립니다.
먼저 손을 든 사람은 이 총리입니다. 그간 거취나 행보에 대한 발언을 극도로 아꼈던 이 총리는 지난 달 후임으로 정세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명되자 종로 출마에 대한 의지를 점점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난 2일 KBS와 인터뷰에서 이 총리는 종로 출마 가능성에 대해 “국회 의사일정이나 당의 구상 같은 변수들이 있어 확답할 단계는 아니다”면서도 “정치의 흐름을 읽는 편인데 그쪽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을까,라는 저의 감상을 말씀드린다”고 답했습니다.
다음 날인 CBS라디오 인터뷰에서는 황 대표와 맞붙는 가정적 상황에 대해 “일부러 반길 것도 없지만, 피할 재간도 없는 것 아니겠나”라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황 대표는 조심스럽습니다. 황 대표는 지난 8일에도 “당에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으로 험지, 험지보다 더한 곳이라도 하겠다”고 말했지만 출마 지역에 대한 구체적 힌트는 여전히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하듯 한국당 내에서는 ‘종로가 왜 험지냐’‘굳이 이번에 맞붙을 필요가 있나’ 등 황 대표의 다른 선택 가능성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황 대표가 종로로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당내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종로 승리가 정치적 성공 담보하진 않아
물론 종로 선거에서 이긴다고 해서 무조건 정치 대로로 나가 쾌속 질주하게 되는 건 아닙니다.
정치인에게는 기본적으로 ‘스토리’가 필요합니다. 도전하고, 어려움을 넘으면서 국민의 지지 속에 계속 성장하는 드라마 말입니다.
현재 종로구 현역 의원인 정세균 민주당 의원이 그 같은 스토리 만들기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세상에 쉬운 선거는 없다지만 정세균 의원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4선을 뒷받침해줬던 고향 전북 무주·진안·장수를 뒤로 하고 아무런 인연이 없던 종로에서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심지어 상대는 6선의 홍사덕 새누리당 후보였습니다. 20대 총선에선 서울시장 출신의 오세훈 후보와 만났습니다. 이기기 어려울 거라던 선거에서 모두 이긴 정 의원은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정치인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패해도 ‘스토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렇습니다. 당선 전에 먼저 겪었던 종로 낙선의 경험은 노 전 대통령 정치 인생에 큰 자산이 됐습니다. 심지어 낙선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득표율은 2위도 아닌 3위였습니다.
21대 총선 종로 출마를 두고 벌써 끝장 승부, 치킨게임, 피 흘리는 대전, 패자의 무덤 등 무시무시한 관측이 오갑니다. 하지만 이는 ‘유권자’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정치공학 타령입니다.
선거의 핵심은 유권자의 마음을 얻어가면서 지지율이 점점 우상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인지도가 높은 정치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으로서의 역량, 철학과 비전을 성실하게 보여주고 유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신뢰를 차곡차곡 모아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아니, 제발 그게 가장 중요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총선 내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종로. 적어도 다음 국회를 동식물에 비유되지 않게 하는 데 앞장 설 인물들이 종로 후보로 나왔으면 합니다. 그리고 꼭 그런 인물이 새로운 종로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길 바랍니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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