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자가 은행 대출을 받은 담보물을 다른 사람에게 처분했더라도 배임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채권자 몰래 담보를 팔아치우면 배임죄를 물었던 기존 판례를 뒤집는 첫 사례다.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배임 등의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징역 1년 10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창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
골재 유통업체를 운영하던 A씨는 지난 2015년 12월 골재 생산기기를 구입하면서 이를 양도담보로 내걸고 중소기업은행에서 1억5,000만여원을 대출받았다. 양도담보는 특정 물품을 구입하는 조건으로 대출을 받고 대출금을 변제할 때까지 담보를 설정하는 제도다.
A씨는 대출을 받은 지 3개월이 지난 2016년 3월 골재 생산기기를 5,500만원에 B사에 판매하고 나머지 중 일부를 C씨에게 1억원에 팔았다. 이후 채권자인 은행에 통보하지 않고 무단으로 담보물을 판매한 혐의로 검찰에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기존 판례에 따라 “채권자 몰래 채무자가 담보물을 처분한 만큼 배임죄에 해당한다”며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2심은 “피해금액을 일부 갚고 피해자들과 합의한 정황이 참작된다”며 징역 1년 10개월로 감형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무죄 취지로 사건을 하급심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배임죄가 성립하려면 피고인이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여야 하는데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이러한 관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률에서 정의하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는 일반적으로 신뢰 관계에 기초에 타인의 재산으로 보호하거나 관리하는 자를 뜻한다. 일반 기업에서 재무를 처리하는 직원이 회사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각종 재무업무를 담당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채무자가 신임에 따라 채권자의 지시나 명령을 수행하거나 이를 통해 타인의 재산을 관리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배임죄가 성립하려면 기본적으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로 규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따라 배임죄의 행위 주체인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를 사무의 본질에 입각해 엄격하게 제한해 해석한 판결로 볼 수 있다”며 “종래에는 동산을 양도담보로 제공한 경우 ‘담보가치를 유지할 의무 등이 있다’는 이유로 배임죄 성립을 인정했지만 이번에 판례가 변경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지성기자 engi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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