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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에] 그래도 봄날은 온다

정민정 논설위원

'마스크 대란' 정부무능 드러났지만

'코로나 의병' 등 희생엔 가슴 뭉클

외신도 우리국민 대처에 감동·찬사

함께해 행복했던 봄날로 기억될것





지난 1918년 3월 미국 캔자스주에서 청년들이 잇따라 사망하자 한 의사가 “원인 모를 질병이 유행하고 있다”며 당국의 대응을 촉구했다. 1차 대전에 전력을 쏟아붓던 미국 정부는 이를 묵살했고 “오랜 전쟁으로 인한 피로 증상”이라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인류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전염병 중 하나로 기록된 스페인독감은 당시 전 세계 인구의 5%에 달하는 5,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미국에서도 약 67만5,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의 저자는 전염병에 대처하는 자세를 이렇게 설파한다. “대중의 신뢰를 유지해야 한다. 왜곡하지 않고 숨기지 않고 누군가를 조종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세계가 공포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는 등 세계 각국이 국경 봉쇄 같은 초강수를 쏟아내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글로벌 패닉 상황에서 버텨낼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이 ‘신뢰’라는 점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바로 ‘신뢰’로 대변되는 사회적 자본을 가졌는지의 여부”라고 짚었다. 그는 한국을 중국·이탈리아·프랑스 등과 함께 ‘저신뢰 국가’로 분류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정부의 코로나19 대처는 저신뢰 국가라는 낙인에 유효하게 작용했다. 단적으로 마스크 대란은 정부의 무능과 무지, 무책임을 종합선물세트로 보여주는 촌극이었다. 국내 인구는 약 5,200만명, 생산시설을 풀 가동해도 마스크 생산량은 일주일에 7,000만장에 그친다. 사정이 이런데도 “생산 능력이 충분하다”며 호언장담하다가 수많은 시민을 몇 시간씩 추위에 떨게 했다. 코로나19 정국에서 청와대 정책팀은 존재감이 없었고 정부 관료들은 섣부른 대응과 말실수로 혼란을 가중시켰다. 총선을 앞둔 정치권은 변칙적 선거 전략에다 집안싸움까지 벌이며 혐오만 부추기고 있다.

하지만 주변으로 눈을 돌리면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라는 안도감마저 든다. 민간 의료인들은 대구로 달려가 ‘코로나 의병’을 자처했고 건물주들은 자영업자의 처지를 걱정하며 월세를 내렸다. 물론 모든 게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경남 창원에서는 의료진이 지역 민원 때문에 묵던 호텔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안타까운 사정이 알려지자 모 호텔 대표가 객실을 제공했고 이를 위해 호텔에 입주한 상가 점주들을 일일이 설득했다고 한다. 지역 민원으로 적잖이 상처를 받았을 의료진의 마음을 보듬기 위해 익명의 시민은 ‘고맙고 죄송하다’는 격려의 현수막을 걸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은 살뜰하게 모아온 마스크를 구세군 자선냄비에 기부하고 있다. 이렇게 모인 방역용품은 환경미화원과 버스운전사 등 사회 서비스 종사자에게 전달된다. 국가에 대한 신뢰는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공동체에 대한 신뢰는 강고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이러스가 우리 내부에 잠자고 있던 신뢰를 싹 틔운 셈이다. 외신들은 우리 국민이 보여준 신뢰, 정확하게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정(情)’과 타인의 양보와 희생에 감사할 줄 아는 ‘염치’에 주목한다. 대구를 취재했던 미국 ABC방송의 한 기자는 “공황 상태를 찾아볼 수 없다. 절제심 강한 침착함과 고요함이 버티고 있다”며 감동을 전했다.

어제저녁 퇴근길 마주친 구세군 자선냄비 너머로 천양희 시인의 시가 쓰인 광화문글판이 눈에 들어왔다.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희망을 노래한 작가의 시처럼 두려움과 무력감으로 움츠린 이 시간이 지나면 마스크를 벗어 던진 너와 내가 얼굴을 맞대고 활짝 웃을 수 있는 봄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뒤돌아보면 2020년 3월은 낯뜨거운 ‘국뽕’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라서, 이렇게 멋진 동시대인과 함께하는 오늘이라서 행복했던 봄날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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