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도피 21년 만에 붙잡힌 고(故)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54)씨에게 검찰이 중형을 구형했다. 정씨는 회삿돈 322억원을 해외로 빼돌리고 253억원의 국세를 체납한 혐의를 받는다.
검찰은 1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 윤종섭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정씨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 위반(재산국외도피) 등 사건 결심 공판에서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401억여원 추징도 함께 요청했다. 검찰은 “피고인은 소위 ‘한보 사태’로 우리나라가 IMF에 도움을 요청한 상황에서 주식 600만주를 압류당하자 수천만 달러를 빼돌렸다”며 “해외 도피 중에도 경영에 관여하면서 남은 주식을 헐값에 매각해 도피 자금으로 활용했다”고 말했다.
이날 정씨는 최후진술을 통해 “어리석은 판단 때문에 해외 도피를 했고 그 결과 기약 없는 도피 생활을 했다”면서 “나는 고통과 싸우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이어 그는 “너무나도 큰 죄책감 때문에 죽을 때까지 수감 생활을 통해 참회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가족을 생각하면 하루빨리 그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이중적 마음이 들어 괴롭다”며 “죗값을 치르고 가족과 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보그룹 자회사인 동아시아가스를 운영하던 정씨는 외환위기의 발단이 된 ‘한보 사태’ 수사가 진행되자 1997년 11월 회사가 보유한 루시아석유 주식의 매각자금 322억원을 스위스에 있는 타인 명의 계좌로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당국의 허가 없이 외국으로 돈을 지급한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도 있다. 검찰은 이 가운데 60억여원은 공범들이 정씨 몰래 빼돌린 것이라는 정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혐의액에서 제외했다.
정씨는 1998년 6월 서울중앙지검 조사를 끝으로 잠적했다가 21년 만인 지난해 6월18일 파나마 공항에서 국제공조로 검거됐다. 검찰은 정씨가 출국 기록도 남기지 않은 탓에 공소시효 만료 이틀 전인 2008년 9월 그를 일단 불구속 기소했다. 하지만 기소 이후에도 정씨의 소재가 확인되지 않으면서 재판은 열리지 못했다.
대검찰청 국제협력단은 지난 2018년 8월부터 원점에서 수사를 재개해 그가 A(56)씨 이름의 캐나다 시민권자로 신분을 세탁한 정황을 포착하고 결국 검거에 성공했다.
/이희조기자 lov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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