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1922년 식민지 조선에서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이 선포된 후 1923년부터 오늘날까지 가장 중요한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오직 어린이를 위해 어린이의 날을 따로 만들어 100년 동안 소중하게 지켜 온 것은 우리나라뿐이다.
누가 어린이날을 처음 만들었을까. 소파 방정환이다.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예쁜 말을 짓고, 어린이가 주인공인 뜻깊은 잔칫날을 베풀었다. 월간 잡지 ‘어린이’도 창간했다. 20대 식민지 청년이 꿈꾼 세상은 아무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나라였다. 자연의 모습과 하늘의 소리를 닮은 아이들이 뛰노는 곳,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어린이 나라.
방정환은 아담하고 멋진 또 하나의 선물을 장만했다. 손수 골라 우리말로 옮긴 동화집 ‘사랑의 선물’이다. 방정환은 그림 형제, 샤를 페로, 안데르센, 오스카 와일드 등 세계 명작 동화 10편을 담았다. 1922년 어린이들 품에 안긴 ‘사랑의 선물’은 6년 만에 11판을 돌파할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막상 ‘사랑의 선물’에서 밝고 행복한 이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어린이들은 부모 잃은 고아이거나 끔찍한 가난과 폭력에 시달린다. 또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신세이거나 악당에게 납치돼 갇힌다. 고통 속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천사처럼 환하고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이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랑의 선물’ 첫머리를 장식한 작품은 ‘난파선’이니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난파선’은 이탈리아 작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대표작 ‘쿠오레’의 일부다. 우리에게는 ‘쿠오레’보다 ‘사랑의 학교’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엄마 찾아 3만 리’도 그중 한 편이다. 방정환은 왜 하필 ‘난파선’에서 시작했을까.
오갈 데 없는 고아 소년 마리오와 돈 한 푼 없이 부모를 찾아가는 소녀 줄리엣이 만난 것은 바다 한복판에서다. 하늘 아래 단 하나 동무가 된 소년과 소녀는 사나운 폭풍에 배가 침몰하면서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나뉜다. 마리오는 마지막 남은 구명정에 울부짖는 줄리엣을 태워 보내며 최후를 맞이한다. 자신에게는 슬퍼해 줄 부모도, 돌아가야 할 고향도 없으므로.
끝내 가라앉은 배는 식민지 조선의 운명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마리오와 줄리엣이야말로 조선 어린이들의 처지 그대로다. 그나마 선장이 비장한 각오로 배와 생사를 함께했으니 마리오에게 자그마한 위안이 됐을 법하다. 조선의 소년 소녀들은 그런 어른조차 갖지 못했다.
방정환은 ‘사랑의 선물’에 짤막한 머리말을 붙였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운 속에서 우리처럼, 또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靈)들을 위하여 그윽이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 식민지 어린이의 가슴속을 파고든 비명과 신음 속에서 ‘사랑의 선물’이 번역됐다.
난파된 배에서 어린이를 구출하지 못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어둡고 차디찬 바닷속에 아이들을 버려두고도 진정으로 애도하지 않는 불한당들, 끊임없이 비하와 막말을 일삼는 망나니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야말로 못된 어른이 지배하는 식민지요 어린이의 지옥이다. 방정환은 그 죗값을 단호하게 따져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난파선이 끊이지 않을 것이며 우리 아이들을 또 잃을 것이므로.
‘사랑의 선물’ 맨 마지막에는 묘한 결말의 동화가 실렸다. 꽃의 요정들이 나서서 어리고 착한 연인을 죽인 원수를 시원하게 갚는 이야기다. 안데르센의 원작에다가 자신의 목소리를 입힌 방정환은 꽃의 요정들이 부르는 응징과 앙갚음의 대합창으로 마무리했다. 어린이를 참혹한 지경으로 내모는 사회악에 저항하고 처절하게 싸워야만 천사 같은 동심을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이 ‘사랑의 선물’을 통해 힘겹게 전한 메시지다.
식민지 어린이들에게 값진 선물을 안긴 방정환은 방방곡곡을 누비며 동화 구연, 아동극 공연, 순회강연, 소년회 조직, 아동문화운동을 펼쳤다.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되 잠시도 어린이들과 떨어지지 않은 나날이었다. 안타깝게도 방정환을 소파 아저씨, 뚱보 할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시절은 오지 않았다. 고작 32세 한창때 쓰러진 청년 방정환은 그대로 어린이 가슴속 영원한 동무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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