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정상회담이 있던 지난 2018년 4월27일. 문재인 대통령은 정상회담에 앞서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환담에서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을 가리키며 “남쪽에서는 아주 스타가 됐다”고 치켜세웠다. 김여정이 그해 2월 평창동계올림픽 때 김정은의 특사로 방한해 국내 여론의 관심을 크게 받은 사실을 빗댄 표현이었다. 이 발언으로 장내에서는 큰 웃음이 터졌고 김여정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유력 외신들 “김여정은 떠오르는 스타”
그로부터 정확히 2년이 지난 2020년 4월. 김여정은 김정은의 잠행으로 어느덧 전세계의 조명을 받는 북한 차기 지도자 후보 ‘0순위’가 됐다. 북한 체제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하면 김정은에 이어 김여정까지 분에 넘치는 주목을 받는 셈이다. 2년 전에만 해도 “남쪽 스타”라고 띄워 준 문 대통령도, 얼굴이 빨개진 김여정 본인도 지금과 같은 상황은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27일 북한의 권력 승계 가능성을 분석하며 김여정을 ‘떠오르는 스타(Rising star)’라고 표현했다. 이 매체는 김여정이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총애를 받았으며 10대 때부터 북한 선전선동의 대가인 김기남에게 권력을 위한 훈련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김정은의 잠행이 길어지자 최근 김여정에 관심을 쏟는 해외 언론은 한둘이 아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29일 차기 북한 통치자는 김씨 일가에서 나올 것이라는 데에 의문이 없다면서 그중에서도 김여정을 가장 비중 있게 소개했다. 미국 타임지도 27일 “김정은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김여정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타임지는 김여정을 “김정은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 중 한 명”이라며 김여정이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과 남북·북미정상회담에서 활약하며 국제적 조명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영국의 BBC는 28일 김정은이 사라질 경우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있는 ‘김씨 일가’ 3명을 소개하며 김여정을 첫손에 꼽았다. 김여정을 가장 비중있게 보도한 BBC는 나머지 2명으로 김정은의 친형인 김정철과 숙부인 김평일을 지목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22일 일찌감치 “김정은이 사망 등을 이유로 통치를 할 수 없게 될 경우 ‘권한을 모두 김여정에게 집중한다’는 내부 결정을 북한이 지난해 말 내렸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어 영국 가디언과 미국의 블룸버그통신·뉴스위크·뉴욕포스트 등도 긴급사태 시 김여정을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다뤘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김정은 복귀해도 후계자 지명 가능성”
이에 더해 지난 29일 국회 입법조사처가 내놓은 ‘북한 당 정치국 회의와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3차 회의 분석과 시사점’이라는 보고서 역시 국민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이 보고서는 “김 위원장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김여정의 지위와 역할을 ‘당중앙(후계자)’ 역할까지 확대해 ‘백두혈통’의 통치권을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며 “2020년 김여정의 활동은 사실상 당의 유일지도체제를 책임진 ‘당중앙’의 역할이었다”고 진단했다. 이어 “이것은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역할뿐만 아니라 향후 백두혈통의 공식 후계자로서 지위와 역할로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예고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여정이 단순히 ‘김정은의 동생이자 비서’ 수준이 아니라 공식 후계자 수준으로 역할을 본격 확대할 수 있다는 관측이었다.
무엇보다 입법조사처 보고서는 김정은이 지도자 업무에 복귀하더라도 후계자 지명 절차를 진행할 수 있음을 암시해 눈길을 끌었다. 입법조사처는 “정치국 후보위원에 머물러 있는 김여정의 지위와 역할을 고려할 때 (후계자 지명 과정이) 김 위원장 복귀 후 곧 바로 이뤄지기 보다는 한 차례 공식적인 절차가 더 필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북한에 특이 동향은 없다”는 정부 입장과는 다소 배치되는 분석이었다.
김여정은 지난 3월 돌연 자신의 명의로 청와대에 악담에 가까운 담화를 직접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어 김정은이 자취를 감추기 하루 전인 4월11일에는 정치국 후보위원에 복귀하면서 명실상부한 권력 2인자로 평가받았다.
정작 본인도 잠행 중... 권력 장악 가능성은 미지수
김여정이 실제 김정은의 후계자로 지목되면 이는 사상 초유의 일이 될 전망이다. 현직 최고지도자가 고작 30대에, 직계비속도 아닌 형제를 후계구도로 공식 논의된 적이 지금껏 한 번도 없다. 게다가 1988년 생인 김여정은 이제 갓 32살이 된 ‘여성’이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경우 60대 중반에 넘어서야 후계구도를 논하기 시작했다.
상당수 외신들도 김여정의 권력 장악 가능성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타임지는 김평일 등 다른 경쟁자의 역할에 주목하는 의견을 보도했고 파이낸셜타임즈는 “집권할 경우 집단 통치를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BBC도 “가부장적인 나라에서 여성인 김여정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해 군대를 운영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 매체는 다만 김정철과 김평일에 대해서도 “권력에 관심이 없다”, “평양 엘리트 정치에 주요 인물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태영호 미래통합당 당선인은 27일 밤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지금까지 북한의 권력 이동은 선대의 교통정리에 의한 ‘하향식 수직이동’이었고 북한의 당 이론도 세습에 기초한 ‘대를 이어 혁명위업 계승’이라는 이론이 작용했다”며 “만약 김여정으로 권력이 이양된다면 북한 역사상의 첫 ‘수평이동’인데 북한 당 정책이나 체제는 ‘수평이동’에 이론적으로 준비돼 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김여정은 30대이고 북한 지도부는 60~70대인데 김여정이 오래 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며 김평일을 체제 변화에 변수가 될 인물로 꼽았다.
다만 이 같은 여러 논의에서 한 가지 간과되는 점은 정작 김여정 역시 지난 12일 서부전선 군사 시찰에서 김정은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후 지금까지 자취를 감춘 상태라는 점이다. 오빠의 잠행에 그가 동행 중인지, 물밑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는지, 오빠와 후계 구도에 관한 논의를 하는지, 혹시 그에게도 신변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모든 의문이 아직 베일에만 싸인 상태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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