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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시대 500년 수도 지켰지만...'신중국 광풍' 20년만에 사라져

[최수문의 중국문화유산이야기] <4> 전체의 4% 남은 ‘베이징성곽’

명나라, 베이징을 수도로 정한 이후

몽골 막으려 1439년 벽돌성곽 완성

1564년 외성 확장 '이중의 형태'로

현대 도시개발에 1954년부터 철거

문혁때 봉건잔재 이유로 거의 파괴

'숭문문 터~동남각루' 명맥만 유지

중국 베이징시 둥청구에 있는 ‘명대성곽공원’에서 베이징 시민들이 산책하고 있다. 베이징성곽은 전체의 4%만 남아 있고 그나마 절반 정도가 허물어졌지만 전통도시의 상징으로 여전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베이징 중심에는 행정구역으로 ‘시청구(서성구)’와 ‘둥청구(동성구)’가 있다. 여기서 ‘성’은 베이징성을 의미한다. 베이징 성내를 두 개의 구로 분할한 것이다. 서울의 한양도성 안이 종로구와 중구로 나뉜 것과 비슷하다.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왕징은 차오양구(조양구)에 속해 있다. 이것은 과거 베이징성 성문 가운데 하나이던 조양문에서 따왔다. 서울의 동대문구가 한양도성 동대문에서 유래된 것과 같다.

다만 베이징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도 실제 베이징성곽을 봤다는 경우는 많지 않다. 서울 시민에게 한양도성이 익숙한 것과는 다르다. 이유는 베이징성곽이 존재하지 않아서다. 한양도성의 경우 전체의 70%가량이 원형 또는 복원된 상태로 보존된 반면 베이징성곽은 사실상 사라져버린 상태다.

그나마 아쉬운 대로 전통시대 베이징성곽의 모습을 보고 싶으면 현재 둥청구 베이징역 남쪽 ‘명성장유지공원(明城墻遺址公園)’을 찾아가면 된다. 현대 도시개발의 광풍에 살아남은 베이징성곽이 절반 가까이는 허물어진 채로 1.5㎞ 정도 남아 있다. 중국인들도 이제서야 아쉬웠는지 나름대로 잘 꾸며놓았다. 이외에 베이징성곽 유적으로는 내성을 구성하던 정양문과 덕성문 두 성문이 현존한다. 정양문은 베이징성(내성)의 남쪽 중앙에 있어 중국인들이 보통 전문(前門)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북쪽의 덕성문은 성문 자체는 사라지고 옹성 일부만 있다.

베이징성곽은 한양도성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이유는 두 가지 정도다. 우선 대제국에 맞게 웅장함을 보여줘야겠다는 과시욕에서다. 지금도 중국 건물들을 보면 활용도에 비해 덩치가 큰데, 과거에도 대개 황제들은 그런 욕심을 가졌다. 물론 더 중요하게는 방어 목적 때문이다. 명나라는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한 후에도 여전히 강건한 몽골족의 위협에 시달렸다. 몽골과의 국경이었던 만리장성은 베이징성에서 겨우 60여㎞ 떨어져 있다. 명나라 초기 실제 몽골족이 베이징성을 포위한 적도 있다.

명나라가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한 후 1419년 성곽이 만들어졌는데 흙을 다진 토성이었다. 이후 1439년에야 지금의 벽돌 모습으로 완공된다. 물론 처음에는 자금성을 둘러싼 ‘내성’만 있었다. 이후 1550년 몽골족이 만리장성을 넘어와 베이징성을 포위한 ‘경술의 변’이 발생했다. 방위력 강화를 위해 베이징성곽을 확장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고 1564년 ‘외성’이 완공된다.

원칙상으로 외성이 내성을 밖에서 감싸는 이중의 형태가 돼야 한다. 하지만 당시 자금이 모자랐던 명나라 정부는 외성을 절반만 쌓았다. 이 때문에 전체 베이징성은 남쪽은 넓고 북쪽은 좁은 ‘凸’ 모양이 됐다. 사람들은 이후에 베이징성이 우리가 쓰는 모자와 비슷하다고 해서 ‘모자의 성’이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베이징시의 중심지인 내성은 정사각형에 가까웠는데 현재의 베이징 지하철 2호선이 지나가는 길과 거의 일치한다. 외성은 그 남쪽에 직사각형 형태다. 궁핍했던 명나라가 외성 확장을 포기했는데 이후 들어선 만주족의 청나라도 성곽 증축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미 몽골족을 복속시킨 상황에서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줄어 베이징성곽은 사실상 장식품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베이징성의 정문인 정양문 모습


베이징성곽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세계에 유례없는 당당함을 과시했을 것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전체 베이징성곽은 내성의 길이가 23.3㎞, 외성은 14.4㎞였다. 참고로 원래 한양도성의 길이는 18.6㎞다. 베이징 내성의 경우 높이가 11~12m이고 하부 두께는 17~20m, 상부 두께는 11~12m였다. 외성은 좀 작은데 높이가 6m이고 하부 두께는 12m, 상부 두께는 10m였다.

성문은 내성에 9개, 외성에 7개 등 총 16개가 있었다. 이 중에서 조양문은 내성의 동문 격인데 조선 등 외국 사신들이 드나들었다. 지금 중국 외교부 청사는 조양문 터 바로 바깥에 있다.

축성 이후 500여년 동안 굳게 수도를 지킨 베이징성곽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현대 도시개발의 광풍을 피해가지 못했다. 베이징성곽의 경우 다른 점은 계획적으로 철저히 파괴됐다는 점이다. 중일전쟁 이전에도 일부가 사라졌지만 대부분의 파괴는 이른바 ‘신중국’이라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 단행됐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베이징을 현대화된 사회주의 수도로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성곽은 단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불과했다. 기록상으로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 성곽의 ‘철거’가 시작됐고 이는 이후 20여년 동안 계속됐다. 성곽과 성문이 지나던 자리는 도로가 됐고 벽돌들은 다른 건물들을 짓는 용도로 사용됐다. 그나마 남아 있던 성곽들도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봉건잔재라는 이유로 훼손됐다.

원래 베이징성곽 중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내성의 숭문문 터 인근에서 동남각루에 이르는 1.5㎞ 정도로 전체의 4%에 불과하다. 또 성문은 내성의 정양문과 덕성문만 남았다. 베이징성곽이 너무 없는 것이 아쉬웠는지 중국 정부는 외성의 남문이던 영정문을 2003년 복원해놓았다. / 베이징(글·사진)=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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