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패션업체 구찌가 지난해 2월 목과 얼굴 아랫부분까지 이어지는 터틀넥 스웨터의 겨울 신상품 판매를 돌연 중단하고 공식 사과했다. 이 스웨터의 디자인이 ‘블랙페이스(black face)’ 콘셉트를 차용했다는 논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블랙페이스는 흑인이 아닌 사람이 흑인 흉내를 내기 위해 얼굴을 검게 칠하는 무대 분장을 의미한다. 이렇게 분장하면 얼굴은 모두 검은색인데 눈과 입술 부분만 밝은색이어서 우스꽝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블랙페이스의 역사는 19세기 중후반 미국에서 유행했던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악극단 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에서 넘어온 연극이 발전한 장르로 음악이 가미된 코미디풍의 쇼다. 현대 뮤지컬도 이 쇼에서 발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9세기 후반쯤 민스트럴 쇼에는 백인 배우가 블랙페이스를 하고 과장된 춤과 노래로 흑인노예의 삶을 희화화하는 내용이 거의 고정적으로 들어갔다. 1960년대 들어서 흑인 민권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블랙페이스는 “인종 차별적 행위”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금기시됐다. 이런 사연 때문에 블랙페이스는 미국과 서유럽에서 인종 차별의 대표적 상징이 됐다. 하지만 아시아나 러시아 등에서는 최근까지도 블랙페이스를 했다가 역풍을 맞는 일이 종종 생겼다. 한국에서는 1988년 흑인 분장을 한 코미디 콩트 ‘시커먼스’가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폐지됐다. 지난해 12월에는 러시아 볼쇼이발레단의 무용수들이 흑인 분장을 한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가 블랙페이스 논란으로 곤욕을 치렀다.
미국의 뉴욕메트로폴리탄오페라 단원들이 최근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계기로 새 시즌 작품 선정과 출연진 섭외, 극장 고위직 인선 등에서 ‘인종적 다양성’을 실현해줄 것을 극장 측에 요구했다고 한다. 미국 전역에서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시위가 한창이던 7일 극장 측이 블랙페이스 논란이 있는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를 무료로 스트리밍 서비스했다가 파문이 확산된 데 따른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사람 차별을 용납하지 않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모두 자신에게 사회적 약자를 무시하는 인식이 없는지 되돌아볼 때가 됐다.
/오현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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