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6일 남북 합의에 따라 비무장화된 지역의 ‘요새화’를 선언한 데 이어, 이날 오후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것은 우리와 미국을 향한 전형적인 ‘벼랑 끝 전술’로 보인다. 장기간의 고강도 대북제재로 통치자금인 외화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재선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동시에 압박하는 모양새다.
청와대는 이날 “강력한 유감을 표명한다”며 북한의 추가 도발에 대한 엄중 경고장을 날렸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인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은 “북측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파괴는 남북관계의 발전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바라는 모든 이들의 기대를 저버린 행위”라면서 “정부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사태의 책임이 전적으로 북측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고 밝혔다. 대북 대화 기조를 강조해온 청와대가 강력한 메시지를 내놓은 것은 북한의 도발을 더 이상 좌시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으로 해석된다.
북한은 미국의 정치상황을 보며 적합한 도발 시기를 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실패와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최대 위기에 몰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리스크’까지 발생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전망은 더욱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 역시 임기 후반 정권의 최대 역점 사업인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서 성과를 내야 할 중요한 시기다.
북한은 특히 미국을 향해 ‘정면돌파전’을 내세우며 ‘신형 전략무기’ ‘핵전쟁 억제력 강화’ 등의 엄포를 놓았음에도 한미가 대북제재를 완화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사실상 9·19남북군사합의를 무력화하는 실력행사를 한 것으로 관측된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연락사무소 폭파는 남한에 큰 피해를 준 것은 아니지만 남북관계가 대적 관계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인 만큼 관념적인 충격이 클 것으로 보인다”며 “북한은 도발 수위를 서서히 단계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진단했다.
연락사무소 폭파 이후 북한은 공언한 대로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등 남북 교류협력 시설의 철거와 함께 비무장지대에 다시 군대를 주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는 연락사무소 폭파에 앞서 이날 오전 조선중앙통신 ‘공개보도’ 형식으로 발표한 입장문에서 “우리는 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와 대적관계부서들로부터 북남 합의에 따라 비무장화된 지대들에 군대가 다시 진출하여 전선을 요새화하며 대남 군사적 경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행동방안을 연구할 데 대한 의견을 접수하였다”고 밝혔다.
북측은 ‘합의에 따라 비무장화된 지대’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개성과 금강산 일대를 거론하고 있다. 개성은 서울을 최단시간 내 공격할 수 있는 군사 요충지다. 북한은 2003년 개성공단 착공 이전까지만 해도 개성과 판문읍 봉동리 일대에 2군단 소속의 6사단, 64사단, 62포병여단을 주둔시켰다. 특히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예정된 오는 8월과 노동당 창건 75주년인 10월에 대형 도발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최근 북한의 행보를 볼 때 김 위원장의 도발 시기는 더 앞당겨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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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일본을 관통하는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발사 또는 북미 비핵화 협상의 레드라인(금지선)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다탄두 시험 등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판을 정조준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이 예상보다 빠르게 칼을 빼든 것은 무엇보다 고강도 대북제재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통치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한 행보로 분석된다. 집권 후 북한 주민들에게 경제발전을 약속한 김 위원장이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는 주민들의 분노를 돌릴 외부의 적이 필요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은 주민들이 보는 관영매체인 조선중앙TV를 통해 “16일 14시50분,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북남연락사무소가 비참하게 파괴됐다”고 선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이날 서울발 기사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미국 등의 경제제재를 받는 북한이 이르면 2023년 보유 외화가 바닥나는 상황을 맞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한미일 협상 소식통이 분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연락사무소 폭파가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후계자로 지명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는 해석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실제 김 위원장은 올해 코로나19 상황이 절정에 달하던 4월 신변이상설에 휩싸인 바 있다. 의료계에서는 김 위원장이 흡연과 고도비만으로 심혈관계 질환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언제든 사망할 수 있다는 평가가 많다. 최근 김 제1부부장은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중임을 맡은 데 이어 군부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북한의 실력행사도 김 제1부부장이 13일 “우리는 곧 다음 단계의 행동을 취할 것”이라며 “다음번 대적 행동의 행사권은 우리 군대 총참모부에 넘겨주려고 한다”고 밝힌 후 불과 사흘 만에 나온 조치다. /박우인·허세민기자 wi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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